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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 납치!

published 7월 3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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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모든 엄마들과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포니테일부터 웨딩드레스까지,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었죠. 딸을 사랑스러운 신부이자 유능한 아내로 키우고, 언젠가 손주를 얻는다는 꿈을요!

딸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모든 희망은 산산이 조각났다. 누구나 결국에는 극복할 수 있는, 어린아이 같은 발작이 아니었다. 그 발작은 거칠고 초자연적으로 폭력적이었다. 이제 어떤 남자도 그녀의 딸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다른 아이가 있다 해도, 아무도 그 아이와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아이는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알 수 없는 신의 힘을 가진 남자가 근처에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녀의 민족이 숭배하는 신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분명 그녀의 신들은 그녀의 고통에 무능하거나 무관심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제 딸에게 도움이 필요해요!" 그녀는 마침내 그를 찾았을 때 간청하면서도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그 남자는 그녀를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그때마다 조금 더 큰 소리로 말을 반복하면서, 혹시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그녀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가 받은 유일한 반응은 남자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짜증 섞인 눈길뿐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아마 그는 제가 그저 돈을 구걸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제 딸은 사악한 힘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어요." 그녀는 시도했다.

마침내 구경꾼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한 말이 아니라 그에게 한 말이었다. "그녀를 빨리 내보내세요. 그녀가 모든 사람을 방해하고 있어요."

그녀가 끈질기게 요구하자, 그 남자는 마침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당신 민족을 도우러 온 게 아닙니다. 오직 제 민족을 위해 온 겁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마련된 이 소중한 선물을 개처럼 귀한 민족에게 던져주는 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녀의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개도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예슈아께 깊은 감명을 받은 그녀는 자신이 찾던 부스러기를 얻었습니다. 그녀의 딸은 자유를 얻었고, 그녀의 이야기는 성경에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예슈아께서 생전에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이방인들을 대하신 태도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세상 민족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5:24)

저녁 식사 후에 그분은 포도주 잔을 더 들고 말씀하셨습니다.“이 잔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새 언약입니다. 곧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제사의 피로 세우는 언약 입니다 .”(누가복음 22:20) 이 언약을 “새롭다”고 부르는 이유는 이미 다른 언약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시작 방법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슈아께서 돌아가셨을 때, 혹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그 잔치에 초대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슈아께서 자신을 따르도록 부르신 모든 제자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직계 후손이었습니다. 성령 강림 날 하나님 나라에 새로 들어온 수천 명의 신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으며, 그중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명절인 샤부옷(초실절)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율법의 짐스럽다고 여기는 규정들은 예슈아와 그의 제자들에게는 단지 삶의 방식일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슈아와 함께 3년을 여행하고 성령이 임한 후에도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회당과 성전에 갔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을 "자유"를 원하지 않았고, 일요일에 모임을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에서는 일요일이 일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슈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의 어머니 미리암은 마리아로 불린 적이 없었고, 예슈아의 동생 야곱은 1,000여 년 후 제임스 왕이 성경을 번역할 때까지 야고보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활절, 크리스마스, 사순절을 기념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리우스를 만나다 – 출처: GoodSalt

그러자 세상이 뒤집혔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다가가라는 사명은 예슈아의 제자들에게 분명했습니다 . 세상이 완전히 뒤집힐 때까지 말입니다. 초자연적인 협력으로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와 사도 시몬 베드로의 만남을 마련해 주셨습니다(사도행전 10장 참조). 고넬료는 백부장이었는데, 예슈아께 다가갔던 다른 이방인들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 분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나 유대인들을 향한 고넬료의 헌신적인 기도와 관대함이 그 방문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새 언약에 초대받은 최초의 비유대인이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시끄럽고 떠벌리는 사람이었고, 항상 허용된 것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듯했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유대인의 생각으로는 미친 짓으로 보이는 일, 즉 '부정한 인간', 즉 이방인에게 유대인의 새 언약을 제안하는 일을 할 만한 적임자였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사자들이 그가 머물고 있던 야파에 도착하기 직전, 하나님은 시몬에게 어려운 환상을 보여주시고 비유대인의 진정한 신분에 대한 하늘의 관점을 보여주셨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도착한 그는 [시몬 베드로]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거나 방문하는 것이 우리 법에 어긋나는 줄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름을 받았을 때, 저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왔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사도행전 10:28-29)

이야기는 계속해서 시몬 베드로가 고넬료의 천사 방문 소식을 듣고 예슈아 이야기를 전하다가 성령이 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내려오자 큰 충격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시몬은 하나님께서 “규칙을 바꾸셨다”는 것을 즉시 깨닫습니다. 적어도 그가 이해했던 한에서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유대인의 영적 정결 예식인 침례에 참여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시몬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지만, 결국 그는 사건 전체가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제 다른 민족들을 당신의 품으로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느낍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반대할 것이 없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도다" (행 11:18)

다음은 유대인의 새 언약이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수년간의 격렬한 토론입니다. 바리새인들 중 신자들(네,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5 참조)은 새 언약에 참여하기 위해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준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 바울, 바나바는 유대인의 관습을 고수했지만, 이방인들이 단지 믿음으로 새 언약을 받아들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셨다는 증거를 공유했습니다. 이후 유대 지도자들은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에 합의하고, 언약에 참여하고자 하는 비유대인들에게 도덕성과 관대함에 관한 지침을 보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로마 제국 전역의 수많은 이방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아들 예슈아를 통한 구원과 죄 사함의 메시지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작은 기름부음받은 자들"(기름부음받은 자를 따르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메시지를 민족들에게 전한 학식 있는 유대인 사도들은 태초부터 존재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많은 유대인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기독교인 수에 비해 너무나 적었기 때문에 교회의 교리 대부분은 유대인의 이해와 무관하게 발전했습니다. 성경이 크고 무겁고 값비싼 두루마리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인들 중 다수는 성경의 일부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절반이라도 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러 세대가 흐르고 구세주의 메시지가 계속 전파되면서 신약성서 서신들은 널리 유포되었지만, 유대인이 썼다는 맥락은 거의 잊혀졌습니다. 유대인의 개입 없이, 기독교로 알려지게 된 예슈아에 대한 이방인 신앙은 암울한 시기를 겪었습니다. 이교 문화, 우상 숭배,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규칙을 만들어내는 위계질서가 혼합된 형태로 제도화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교도라는 이방적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을 세우고 그 위에 기도했습니다. 한때 여러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과 맺으신 새 언약에 포함되는 것을 감사히 여겼던 곳에서, 이제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새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다행히 지난 세기에 많은 오류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덜 중요한" 구약 성경을 제외한 신약 성경이 인쇄되면서 이러한 접근 방식의 잔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설교자들이 교인들에게 "성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나올 때마다 이스라엘 대신 당신의 이름을 쓰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당신을 의미하시는 것이니까요!"라고 가르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기록상으로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구하는 것은 매우 좋은 관행입니다. 물론 원래의 약속이 이스라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 한해서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일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의 부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 제시된 역사적 맥락이 필수적이다.

유대인들에게 예슈아에 관해 알려야 할까요?

이 질문은 최근에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에서 4월에 한 TV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처음으로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유대인의 메시아인 예슈아에 대한 쇼를 방영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영향력 있는 유대인들이 이 채널의 방영에 반대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 채널의 방영에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답변하기 전에 그들의 논리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모든 주장이 오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의견 불일치가 미묘하고 핵심 쟁점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제가 제기하는 질문은 이스라엘에 TV 채널이 존재해야 하는지, 또는 어떤 신학적 접근 방식이 다른 접근 방식보다 더 나은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약 성경의 메시지가 유대인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납치된 언약

아름다운 보석, 꽃병, 그림, 가구로 가득한, 대대로 가족에게 물려온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손님들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집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이런 집은 처음 보는 것이라 감히 어떤 물건도 만져보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주 돌아와 친구들을 데려옵니다. 곧 그들은 당신의 집에 익숙해져서 당신의 안내 없이도 모든 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처음 온 손님들은 더 많은 친구들을 데려오고, 그 친구들은 또 다른 친구들을 데려옵니다. 새로 온 친구들 중에는 당신에게 거의 고개도 끄덕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람들이 당신의 집을 둘러보며 그 경이로움에 감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여전히 멋진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유명해진 당신의 집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떼지어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가까이 지내고 더 자주 방문하기 위해 동네로 이사 오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왔는데, 집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처럼 말이죠. 그런데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문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현관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당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중 한 명이 제안합니다. "옷을 갈아입어서 자신들과 더 비슷해 보이면 집에 들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이 마당에 서서 여러 가지 선택을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2층 창문을 열고 당신의 가장 오래된 점토 꽃병 몇 개를 창밖으로 던졌습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 꽃병들도 그 주제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 시나리오의 느낌을 상상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으로서의 기분과 기독교인들이 언약의 축복을 누리는 모습을 보고, 그런 다음 우리와 우리 민족이 바로 그 언약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려고 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예슈아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이방인들의 후손들이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바로 그가 이렇게 말한 바로 그 백성에게 말입니다.

내 마음은 내 민족, 유대인 형제자매들에 대한 쓰라린 슬픔과 끝없는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기꺼이 영원히 저주받아 예슈아에게서 끊어질 것입니다! (로마서 9:2-3)

기독교인이 유대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그런 시도는 전적으로 불필요하고 오히려 역효과를 낳습니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의 새 언약에 접붙여졌지만, 유대인은 기독교 언약에 접붙여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유산을 버리고 이방인과 같은 기독교적 삶을 사는 유대인은 죄 사함과 영생의 은총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한 부르심은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민족에게 접근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대인에게 증거하려고 달려가기 전에 그들의 독특성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예슈아의 이름으로 수 세기 동안 자행된 잔혹 행위 때문에 많은 교량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이번 호의 " 그들이 가르쳐주지 않는 교회사 "를 참조하세요).

외부의 이방인을 보내는 것보다 유대인 신자들이 자신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전반적으로 더 적절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새 언약에 대해 알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구원의 근원에 대해 엄청난 무지함을 드러냅니다. 예슈아께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더욱이 유대인들이 예슈아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행동을 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애정을 담아 “상속”이라고 부르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을 방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온 인류를 당신께로 회복시키시는 것을 의도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슈아를 보고 영감을 받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면, 그분은 당신만의 규칙을 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계획은 유대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예슈아를 거부할 것을 아셨고, 그 거부를 통해 열방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을 기도의 짐으로 지고, 그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차례입니다.

이러한 도발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교회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이미 언약을 맺었으니 다른 언약이 필요 없다고 선언하는 것으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변화된 삶과 그들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신 새 언약을 통해 이 모든 것이 가능해졌음을 깨달을 때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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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신자들과 함께 서십시오

마오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땅 구석구석에 예슈아의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부는 믿는 자들을 훈련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이 영원한 사역에 동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