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일: 2021년 2월 1일 |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

아리는 미국의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에 따르면, 아리의 어머니 타치야나는 러시아에서 포그롬(20세기 초반에 있었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에 왔습니다. 타치야나는 가족 중 생존자 몇 명과 배에 올라탔고 영국이 다스리던 성지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배에 탄 모두가 거절을 당했고, 그녀는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시민권을 받았지요. 그 운명의 여행 중에 타치야나는 아리의 아버지이자 인도 출신의 의사 호카노 소르코람을 만났습니다. 미시간에 정착한 부부는 결혼하여 7명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아리는 여섯째였지요.

저희가 아는 바는 그게 거의 다입니다. 왜냐하면 아리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가족들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아서 모든 것을 홀로 지탱해온 어머니는 머리에 부상을 입게 되었고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아리는 왜 그런 결정이 내려졌는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지만, 여섯 형제자매가 함께 ‘어린이 마을'이라는 곳으로 보내진 가운데 아리는 홀로 다른 곳에 보내졌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나이인 두 살 때부터 그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도 없이 자라게 된 것입니다. 그 어린 나이부터 아무런 장기적인 관계도 없이 자란 아리는 누가 자신을 돌봐줬는지,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어느 시점까지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때에야 남자 기숙 학교로 보내졌지요.

11세의 아리. 그의 어린 시절에 찍은 유일한 사진.

남자 학교의 모든 아이들은 여름마다 가족들을 만나러 집에 갔다가 가을에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가족이 없던 아리는 학교에 직원들과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대우를 받았고 모범생이었지만, 여름은 외로운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5학년 여름에 그는 도망을 쳤습니다. 그를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붙잡았을 때, 교직원들은 왜 도망했냐고 물었습니다. 아리는 단순히 학교 건물 밖을 혼자 나가본 적이 없어서 밖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 해 여름에 직원들은 아리가 참여할 수 있는 여름 캠프를 찾아주었습니다. 거기 있는 동안 한 젊은 부부가 그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을 태어나서 처음 만났기 때문에 이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캠프가 끝나고 작별을 하는데, 젊은 부부는 그에게 유대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이야기하며 아리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아리에게 성경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냈고, 그 다음 해에 아리는 성경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하는 건 자연스러운데, 이후 몇 권의 책을 읽었을 때 아리는 더 이상 읽고 싶질 않았습니다. 이 부부와 같이 하나님을 알고 싶었던 것인데, 성경이라는 책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죠. 다음 해 여름, 다시 캠프에서 부부를 만났을 때 아리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어 너무나 괴로웠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부는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려주고, 13살이라는 나이에 아리는 주님과의 동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아리는 미군에 입대했다.

졸업 이후의 삶

고등학교 졸업반 때, 아리의 형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를 찾다가 마지막 한 해를 자신과 같이 보낼 수 있게 이사를 하면 어떠냐고 제안합니다. 1959년, 졸업과 함께 아리는 군대에 입대하고 특별 임무를 갖고 NATO에서 복무합니다. 군복무중 아리는 육상도 하고 라이트헤비급 복싱 챔피언도 되었으며, 프랑스 내셔널 럭비 리그에서 뛰기도 했습니다.

군대를 떠난 그는 NFL 팀과 계약을 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대학 공부를 하기로 결정하고 USC에서 심리학과 행동 연구를 전공합니다.

아리는 군대와 대학 생활 동안 국제 육상 대회에 출전했다.

행동 연구를 계속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 LA 보안관 부서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보안관으로 일하면서 그는 할리우드의 딘 마틴이라는 영화에 형사 역으로 연기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죠.

당시 아리는 연기 경험이 없었지만 감독이 실제 경험이 있는 사람을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형사 역할이다 보니 아리는 편안하게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반응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전히 우연인 것처럼 아리는 오디션도 없이 연기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C.H.I.P.S., 하와이, 최초의 원더우먼 시리즈 등 약 100편의 영화와 TV 시리즈에 출연했지만, 아리는 항상 깨끗한 역할만 했습니다. 많은 경우 공개석상부터 교도소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그는 자신의 간증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아리는 프랑스의 내셔널 럭비 리그, 미육군 유럽 축구 리그에서 뛰었고 이후 NFL과 계약했다.

아리 & 쉬라의 만남

1976년, 둘이 함께 알던 친구 잭 헤이포드 목사를 통해, 아리는 젊은 이스라엘-미국 국적자이자 영화 감독 쉬라 린지를 만났는데, 그녀 역시 메시아닉 유대인이었습니다. 쉬라는 이스라엘에 가서 그 땅에 메시아닉 교두보를 개척할 믿는 유대인을 찾으러 미국에 온 것이었습니다.

아리는 새로운 TV 시리즈로 계약을 막 한 상태였고, 당장 빠질 수 없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1년 동안 이스라엘에 가는 부분을 어찌할까 주님께 계속 구한 결과, “하다 말고 떠나야 하는 모든 일들을 다 처리해주신다면, 영화 계약들로부터 꺼내주신다면 성지로 가보겠습니다"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아리(오른쪽)는 라이트 헤비급 복싱 챔피언이 되었다.

몇 주가 되지 않아, 그는 모든 계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하다가 마는 일들도 정리가 되었고 그는 1년 계획으로 이스라엘 방문 길에 오릅니다. 체류 6개월이 지나기 전, 아리는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예쁜 여자 쉬라에게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야포의 한 카페에서 프로포즈를 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함께 메시아닉 운동을 세워가기로 한 거죠.

아리와 쉬라가 결혼하기도 전에 이스라엘 현지 영화계에 아리가 왔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는 많은 역할에 대한 제의를 받았습니다. 많은 작품을 거절했지만, 그가 한 영화들은 이스라엘에서 초기 활동을 위한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후 20여년 간 아리는 여러 액션 영화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교육용 TV 시리즈에 출연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영화 수가 너무나 적었고 이스라엘 TV 채널도 사실상 하나였기 때문에, 아리가 거리를 지나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어렸을 때 어떤 작품을 보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대학 시절, 아리는 LA 보안관 부서에서 일하게 됐다.

공동체를 세워가다

아리와 쉬라에게, 메시아닉 공동체를 짓는 첫 단계는 연주하고 노래하면서도 이웃들에게 방해가 안 되는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텔아비브 변두리 헤르쯜리야의 주택을 임대하여, 개척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최초의 성령 충만한, 히브리어 메시아닉 공동체가 거의 2000년 만에 이스라엘에 세워지게 되는 것이었지요.

선구적인 일을 한다는 것은 지나고 보면 전설 같이 들리지만, 공동체 개척 초기 사역의 대부분은 사람들을 모임 장소로 데려오고 데려다주는 실질적인 일들이었습니다.

당시 차가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샤밭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리는 모든 예배 전후에 근처 마을들로 여러 번을 운행해야 했습니다. 공동체 일원들이 버스가 없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금요일에 버스를 타고 와서 마당에서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한 적도 몇 번 있었죠. 그 후엔 토요일 해가 지고 나면 처음 운행하는 버스를 잡아서 돌아가려고 기다렸습니다. 70년대였기 때문에 이웃들은 히피 문화가 이 동네에도 들어왔다는 우려를 표했고, 그런 행동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런 주말 중에 한 번은 몇 명이 저녁 버스를 타려고 계획을 했는데, 예배가 평소보다 늦게 끝난 것입니다. 그들은 버스를 놓쳤고, 그 때문에 고속도로에 그 시간에 있지 않았던 건데 바로 그때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버스를 운전하며 고속도로에 총을 난사하고 다녔습니다. 38명의 이스라엘인이 죽고 71명이 부상을 입었죠.


아리는 20대 후반에 연기를 시작하여 TV와 영화 모두에 출연했다.

히브리어로의 전환

처음에는 설교를 영어로 전하고 히브리어로 통역을 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찬양곡이 없어서 찬양은 영어로 했죠. 히브리어 전용 예배를 목표로 하여, 아리와 쉬라는 찬양 시간도 히브리어로만 하도록 밀어부쳤습니다. 그들은 친구 다비드와 리사 로덴을 데려왔는데, 그들은 새로 쓴 히브리어 곡들을 기꺼이 무리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2020년 6월 호에 자세히 소개되었습니다.)

히브리 찬양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영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면, 천사들이 그 초기 모임을 보고 충분히 깔깔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텔아비브 지역에서 히브리어를 쓰지만 전통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 외엔 찬양이라곤 모르는 이스라엘인들이 히브리어는 잘 모르지만 열정이 가득한 서양인들과 함께 노래하려고 애쓰는 모습 말이죠!

다비드와 리사 로덴은 히브리어 전용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위해 히브리어 창작 찬양 곡을 소개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변화와 익숙함이라는 것은 재미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인 일부는 찬양을 어려워했습니다. 그들은 히브리어보다 영어로 노래하고 기도하면서 훨씬 더 깊은 기름 부으심을 느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그 초기 예배들이 정말 볼만했고 들을만 했으리라는 게 상상이 되시죠?

물리적인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아리와 쉬라의 작은 모임들은 곧 70명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참석자들 대다수는 해외에서 온 자원봉사자로서, 교제 시간에 본능적으로 모국어를 써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참여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부부의 비전은 히브리어를 전적으로 쓰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기에, 이제 마지막 조치를 취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리는 공동체 식구들에게 2주 말미를 주고, 설교와 찬양이 히브리어로 진행될 것이며 영어 통역은 뒤에서 따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2주만에 참석자들의 숫자는 겨우 열 몇 명으로 떨어졌습니다.

예배의 에너지에 있어서는 극적인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진정으로 이스라엘식 공동체를 세워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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