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일: 2021년 5월 1일 |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

1800년대 후반,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고토로 돌아가야 한다는 부르심에 응답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에겐 길이 막혔는데, 처음엔 투르크족이 또 그 다음에는 영국 그러니까 땅을 통제하던 이들이 막았다. 이러한 저항은 해안 근처로 칠흑 같은 밤에 배들이 도착하고 산맥 혹은 사막을 통해 육로 여행을 하는 일종의 “지하철도"를 탄생시켰다. 이야기가 전해져내려오면서, 러시아의 핍박을 피해 탈출하던 아리의 어머니도 그중 한 대의 배에 타고 있었는데, 돌려보내졌다. 대신 그녀는 미국에 정착하게 됐고 살아서 보진 못했지만, 그녀의 아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꿈을 이뤘다.

아이러니컬한 기시감 가운데,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했을 때, 고토로 돌아가고자 하는 일부 유대인들을 막아서는 것은 이스라엘 랍비 당국이 될 것이었다.

초기에 크네세트는 유대인 조부모가 한 명만 확인되는 사람이면 누구든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것이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식별하여 수용소로 집어넣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 사람의 피가 1/4만 유대계면 이스라엘 국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후 초정통파 유대교계의 주장으로 인해, 이 법은 수정되어 다음 사항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개종하지 않은 자"

하지만 여기서 아무도 유교, 힌두교, 불교, 범신교, 뉴에이지, 무신론적 인본주의 혹은 오컬트로 개종한 유대인이 종교 때문에 이스라엘 입국을 거부 당한 케이스는 들어보 적이 없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조치는 예슈아가 유대인들의 메시아라고 믿는 유대인들을 노린 것이었다. 이 법은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이스라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었다. 얼마나 이상한가. 히틀러는 그런 구분을 짓지 않았다.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도 무조건 가스실로 보내졌다.

유대인 랍비 예슈아를 향한 이러한 적대감은 1900년대 후반 제2의 “지하철도”가 개발되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 현대 기술이 없었다면, 우리가 믿는 유대인들이 알리야 하도록 돕는 과정은 지루했을 테지만, 이제는 예슈아를 메시아로 믿는 수만의 이스라엘인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이 아니라고 한대도 상당수는 초기에 시민권을 받고 메시아닉 운동을 세우기 위해 수고한 믿는 유대인들의 열매다. 다른 모든 걸 배제하고 묻는다면, 믿는 유대인들은 랍비 당국에 자신의 신앙에 대해 거짓말을 할 일이 없을 테지만, 약간의 코칭을 통해 우리를 비롯한 다른 몇몇 믿는 이들은 이민 과정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고 청렴하게 통과하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1980년대 아리와 쉬라 소르코람

개리와 셜리

1980년대 중반, 이스라엘로 이민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믿는 유대인들이 점차 늘고 있었는데 개리와 셜리 베레스포드 부부도 그중 하나였다. 양가 모두 유대인인 집안에서 태어난 부부는 짐바브웨에 사는 동안 그 나라 전체에서 유일하게 믿는 유대인 부부로 알려진 이들과 사귀면서 믿음을 갖게 됐다. 베레스포드 부부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마지막 때에 유대 민족이 고토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배웠다. 결국 이들은 이스라엘로 끌리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지만, 처음에 셜리는 당시 짐바브웨와 비교할 때 이스라엘이 얼마나 생활 수준이 열악한 지를 들며 거절했다!

안타깝게도 둘이 마침내 이민을 결정했을 때, 성인이 되었던 부부의 자녀 중 한 명이 믿음에 반대하여 그들을 유대 연맹(the Jewish Federation)에 고발했다. 이것은 눈덩이가 되어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들에 대한 대법원의 획기적 판례로 남았다.

수세기 동안 유대 전통은 어머니가 유대인인 사람을 유대인이라고 정해왔지만, 성경 시대에는 아버지의 정체성에 따라 유대인 여부가 결정되었다. 기묘한 반전의 아이러니 속에, 베레스포드 부부는 양가 어머니가 다 유대인인데도 믿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시민권을 거부 당했다. 어머니 중 한쪽만 이방인이었어도,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유대교 신앙을 버렸다는 랍비 당국의 판단은 없었을 것이다.

마오즈 사역 센터에서 회중 행사를 준비하는 셜리와 게리 베레스포드 옆에 서 있는 아리(왼쪽)

마오즈의 지원

개리와 셜리가 처음에 이스라엘로 이주했을 때 그들은 라마트 하샤론에 위치한 우리 공동체에 등록을 했고 우리 부부는 그들의 사건에 긴밀히 관여했다. 우린 말했다. “이건 반드시 싸워야 해요. 노골적으로 죄를 짓는 유대인들도 유대인으로 인정 받아요. 랍비 당국이 예슈아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이 비유대인이라고 결정 내리도록 놔두면, 오로지 랍비 지도자들이 수천년 동안 증오해온 유대인 메시아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메시아닉 유대인들의 이민은 완전히 막힐 수 있어요.”

이 나라에서 법적 신분을 얻지 못한 베레스포드 부부는 관광객으로 체류하며 근로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사건에 대해 폭넓게 쓰고 소송 비용을 감당하기 위한 모금을 했다. 전 세계 신자들이 그들을 이스라엘에 지킬 수 있도록 기도와 후원으로 일어섰다. 이 상황의 중대성을 파악한 제이 세컬로우 변호사는 당시 자문으로 우리를 도우려했다. 이것은 단 한 부부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맞서 싸워야 하는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사건을 위한 기도는 현지인들과 해외 신자들의 연합으로 가속도가 사상 초유였기에, 1989년 베레스포드 부부의 시민권 신청을 기각하는 판결을 대법원 판사들이 내렸던 성탄절, 그 참담함은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약자를 위한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나가기로 결단했다. 우리는 베레스포드 소송 사건의 항소를 위해 계속 재정을 지원했다. 그러나 약 6년의 법정 지연 끝에 1992년 7월 2일, 대법원은 베레스포드의 시민권 신청을 최종 거부했다.

그리고서 법원은 베레스포드와 또 시민권을 거부 당한 다른 두 가정에게 $6,250을 요구했다. 패소했다는 이유였다! 놀라운 마오즈 동역자들은 이 메시아닉 선구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고, 이 벌금을 완납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믿음이란 건 재미있다. 그리고 응답 받지 못한 것 같은 기도는 그대로 버려져있지 않는다.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닉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갑자기 유대인으로서 예슈아를 영접하게 된 독특한 메시아닉 유대인들의 정체성에 대해 듣게 된 것이다. 베레스포드 부부는 간증과 함께 메시아닉 유대교에 대해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여러 나라에서 받았다.

 


이스라엘 신자들은 총리실 앞에서 베레스포드 부부를 위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같은 날, 거리 한쪽에서는 하마스 활동가들이 시위를 벌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종교적 유대인들이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의 일부로 남길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땅 분쟁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이 도착했지만, 이스라엘 신자들은 두 진영 사이에 끼어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응답 - 하나님의 방법

어쩌면 어떤 기도는 즉각, 그리고 기적적으로 응답이 되지만 어떤 기도는 그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대와 아주 다르게 응답된다. 우리는 그들의 소송에서 패했지만, 베레스포드 부부에게 좋지 않은 판결이 나왔을 때 이스라엘은 이 땅에 가득 밀려드는 약 백만의 러시아계 유대인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러시아에서 그 당시 일어났던 대규모 부흥 집회들 가운데 거듭난 이들은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이러한 대량 유입은 통상 각 개인의 믿음에 대해 조사하느라 바빴을 공무원들이 쓰나미처럼 이스라엘로 몰려 들어오는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들을 감당하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뜻했다. 유대인으로서 예슈아를 믿는 것의 적법성을 거부한 획기적인 판결이 있고 몇 달 만에 서구의 많은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또 시민권 취득에 성공하고 있었다. 한 번은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시민권을 받아 우리가 모든 곳을 찾아다니며 현지인들을 옆에 붙여주고 적응을 돕게 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민권을 신청한 이들 중에 밐하엘(가명) 가족이 있었다. 아주 알려진 메시아닉 리더였던 그는 먼저 시민권 신청을 위해 왔다가 정해진 시간 내에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올 계획이었다. 그와 아내 사라(가명)는 시민권 취득을 위한, 중대한 귀국을 계획해두었다. 하지만 비행기 타기 불과 며칠 전에, 밐하엘은 다리가 부러져 일정을 미뤄야 했다.

이들에겐 왔다갔다 하며 다시 절차를 밟을 정도로 재정이 넉넉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것은 가족이 시민권을 받을 수 있는 하나 뿐인 기회였다. 그래서 사라는 혼자 왔다. 물론 이스라엘은 무엇보다도 끝없는 장애물을 안겨주는 나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사라가 계획을 밀어부쳐 홀로 비행을 했지만, 도착해보니 정부 기관들이 장기 파업을 했다는 쓰리도록 실망스러운 소식을 마주해야 했다.

사라와 나는 전심으로 기도했다. 우리는 무조건 출입국 관리소에 가보기로 했다. 당시 텔아비브에서 뿐 아니라 중동 전체에서 최고층 건물이던 34층짜리 샬롬 타워 앞에 새벽 6시에 도착했다. 출입국 관리소가 거기 있었지만, 뉴스를 통해 응급 케이스만 처리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련이 무너진 후 몇 년 만에 백만 명의 러시아인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었습니다. 러시아인의 유입은 이스라엘의 문화와 발전의 여러 분야에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크레딧: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

아주 이른 시각에도 파업을 선언했다는 데에 개의치 않는 수많은 무리가 건물 밖에 줄을 서있었다. 건물 정문의 경비가 한 번에 몇 명씩 들여보내줬다. 우리도 들어갔다.

드디어 해당 층을 찾아 올라갔을 때, 한 50명 가량의 무리가 꽉 차게 이미 잠긴 문을 둘러싸고 있었다. 5분 정도마다 경비가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요청 사항을 외쳤고 경비는 혼란 속에서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안 돼요! 못 들어가요! 우린 파업 중입니다!” 그리곤 문을 잠갔다. 같은 장면이 계속 반복됐다.

당시 이스라엘은 줄서기에 대해 전혀 개념이 없었기에, 나는 팔꿈치와 발을 최대한 멀리 뻗어 새로운 사람들이 우리 앞에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서서히 우리는 줄의 맨 앞자리로 향해 갔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우리는 영어로 말했다! “이머전시(Emergency)!” (다리가 부러졌으니 응급 상황은 맞지 않는가?) “이 친구는 시민권을 받으러온 거에요. 남편이 다리가 부러져서 못 왔으니, 응급 상황이죠!” 그리고서 나는 출입구에 발을 끼워 뒀다.

경비는 우리를 보더니 들여보내줬다. 우리는 아주 여러 사람들에게 인도되었는데, 결국 마주하게 된 공무원은 책상에 가득한, 정리 안 된 서류 뭉치들 가운데서 사라의 신청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서 그가 정리를 하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사라는 종이 하나가 그의 손 안으로 날아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보니 열린 창문이 없었지만, 어디선가 날아온 한 숨의 바람이 그 종이를 움직인 듯했고 그게 바로 자신의 신청서였다.

공무원은 종이를 쳐다보고 말했다. “이건 처리가 안 됩니다. 자녀를 함께 데려오셔야 시민권 맹세를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때 그의 자리에 전화가 울렸고 종이 한 뭉치를 든 다른 공무원이 문으로 들어왔다. 사라의 담당관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통화를 동시에 했는데, 그는 정신이 나간듯 종이에 서명을 하고 사라에게 건네줬다.

사인이 된 종이들을 들고 최종 결정권자에게 갔더니 이렇게 물었다. “자녀들은 어디 있나요?” 사라는 대답했다. “데려올 필요가 없다고 안내 받았는데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남편의 신분증이 있으세요?” 그녀는 남편의 사진을 보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 맞아요! 이 분 기억해요! 대단히 기분 좋은 분이었어요!” 샬롬 타워에서 나오면서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휴! 홍해가 열린 기적이었어!” 또 하나의 거듭난 유대인 가족이 이스라엘에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이 당시 일어난 수많은 기적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후 몇 년 동안, 주님께서는 뛰어난 메시아닉 리더들과 젊은 믿는 유대인들을 줄기차게 그 땅에 들어오게 하셨다. 그들은 메시아닉 운동의 기초를 놓는 데에 일조했고, 그 결과로 오늘날 이토록 생장력이 충만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의 아리와 시라는 항상 미래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은 것을 치유해주듯 베레스포드 부부를 신고했던 아들은 이후 사과를 했다. 그리고 부부를 위한 많은 기도가 다른 이들을 위한 응답만을 가져온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수년 후에 부부는 다시 신청을 했고 빠르고 조용하게 시민권을 부여 받았다. 메시아의 땅, 조상들의 땅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분명 예슈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유대인들의 이민에는 아직도 문제가 남아있지만, 개인, 정부, 군대, 현지 주민들은 예슈아를 따르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충성스럽고, 준법적이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돌아왔을 때, 최초의 선구자들이 도착했을 때로부터 예루살렘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와 사람들이 옛 말씀과 관습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우리 부부가 이스라엘에서 보낸 수십 년을 돌아보니, 정직하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 갈 길은 멀지만, 분명 탄탄한 진보가 있었다. 하나님의 왕국은 확장되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우리를 비롯한 당신의 종들을 더 전진하도록 사용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최고와 최악의 날들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우린 이제 시작했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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