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됨: 게시일: 2021년 1월 1일 |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

통곡의 벽의 거대한 돌들을 처음 대면했을 때, 난 19살이었다.

동예루살렘이 아직 요르단의 손에 있던 1959년이었다. 나는 부모님과 여러 유명 사역자들과 함께 투어로 왔었다. 이 사역자들 가운데에는 담대하기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통곡의 벽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현지 가이드는 겁에 질려 속삭였다. “기도를 하시면 우리 잡혀가요.”

요르단은 영국이 이곳을 떠나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일어난 권력 공백 기간 중 유대-사마리아 지역 전체를 점령했다. 1948년부터 1967년까지 종교의 자유는 무슬림들에게만 존재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 구도시에 허용되지 않았다. 통곡의 벽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기억하게 되는 것을 보면 재미있다. 눈이 오는데 나는 샌들을 신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쓰러져가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벽 앞에 서 있으면 골목이 얼마나 좁아 보였나 생각난다. 골목과 어두운 지저분한 길들이 기억난다. 구식 버스가 엔진 소리를 내며 큰 길을 지나가면 당나귀들이 그 곁을 터덜터덜 걸어갔다.

1967년, 나는 다시 예루살렘 투어를 계획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는 매 시간 상황 업데이트를 들으려고 라디오에 바싹 붙어있었다. 사흘째,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듣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이 통곡의 벽을 포함한 구도시를 점령했다는 것이었다. 닷새, 엿새째에는 골린 고원 밖으로 시리아를 몰아냈다. 6일 만에 전쟁이 끝난 것이었다.

나는 그 월요일에, 토요일이면 옛 성전의 바깥 벽에서 기도하게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라 감히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예루살렘 해방 한 달 전에 "황금의 예루살렘"이라는 곡-동예루살렘으로, 여리고를 지나 사해를 여행하는 이야기가 담긴-을 발표하고 아이콘이 된 나오미 셰메르라는 여성을 빼고는 아무도 말이다. 그녀가 선견지명이 있는 곡을 쓴 것은 그 때만이 아니었다.

그 해 10월, 우리 투어 그룹이 이스라엘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곡의 예언과 딱 맞게, 우리 버스는 새로 다닐 수 있게 된 길로, 예루살렘에서부터 사해를 지나 여리고에 갔다. 우리 이스라엘 가이드는 탱크 운전사 출신으로, 골란의 승리를 이끈 장본인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이스라엘 마을을 파괴할 준비를 마치고 갈릴리 국경까지 왔던, 타버린 탱크 한 대를 보여주었다. 적들의 탱크를 향해 탱크를 움직여 가는 상황을 묘사하는데, 그의 머릿속에 그것이 얼마나 생생한 지가 느껴졌다. 그는 또 시리아인들이 너무나 심하게 져서 탱크에서 뛰어내려 시리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쉬라와 아버지가 이스라엘 투어의 일환으로 이집트에 방문

예루살렘이 수복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쪽 벽이라고 알려지게 된 통곡의 벽에 갔던 일은 처음 방문과는 전혀 달랐다. 이스라엘은 거대한 공간을 가로막고 있던 판잣집들을 없앴고, 벽 앞에는 거대한 광장을 만들어 놓았다. 이 구역은 보기에 어두웠고 수 세기 동안 칙칙했는데, 이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종교적이지 않은 유대인들조차 쓰레기 무더기를 치우는 가운데 공기에서까지 운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나라 전체가 기뻐 뛰고 있었다. 이제 “메시아의 때"가 이르렀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또한 IDF의 놀라운 위업에 대해 극도의 자부심을 가졌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차에 “명예로운 IDF”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

투어는 끝났고, 우리 그룹은 버스를 타기 위해 호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착이 됐고, 나는 아빠와 앉아서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아빠가 이렇게 질문했다. “이스라엘이 거의 2천년 만에 예루살렘 구도시와 성전을 수복한 것에 대한 예언의 성취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어떠니?”

우리 아버지는 이스라엘을 사랑했는데, 나는 막 멕시코에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 프로젝트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웠다. 내가 존경하던 한 여인은 이보다 수년 앞서 내가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해줬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제3세계 국가였고 나는 그곳에 살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화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18~21세의 아이들이 그 나라의 생존 자체를 걸고 전쟁을 치른 곳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구 국가에서 볼 수 없는 진지함을 갖고 있었다. 버스가 도착했을 때 나는 몇 주간 더 머물며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1948년까지 수년 동안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 앞의 좁은 공간에 몰려서 기도해야 했다. (출처: 위키백과)

이스라엘에서는 몇 주 만에 어떤 일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대본 작업에만 1년이 걸렸다. 너무나 많은 예언들이 있었고, 예루살렘의 해방 이후 몇 달 간 내 주변에선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우리 아버지는 비전의 사람이었다. 그보다 1년 전 아버지는 당시 요르단이던 올리브 산에 부동산을 구입해두었다. 성경적으로, 예슈아께서 올리브 산으로 오신다면, 그 땅이 결국 유대인들의 손에 돌아올 것을 아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당시 다른 누구도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슈아를 자신들의 메시아-유대 민족의 유대인 메시아-로 받아들일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 건물이 유대인들이 동족에게 아웃리치하는 데에 쓰일 훈련 센터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 건물에서 난 이스라엘에서의 첫 해를 살았다.

오래된 집이었는데, 비가 오면 울부짖는 바람이 한밤중에 내 침대 곁의 금속 셔터를 꽝꽝 때리며 열어 젖혔다. 그러나 아침에 창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초현실적이었다. 불과 몇 백 미터 아래에 성전산이 있었던 것이다.

6일 전쟁 끝에 15명의 업자들이 긴급 작전을 위해 투입됐다.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와서 기도하는 샤부옽을 위해 통곡의 벽 앞에 있는 구조물을 철거하라는 것이었다. (단 하다니 -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

1967년 당시, 올리브 산은 모두에게 조용하고 안전한 곳이었다. 아랍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갖게 된 새로운 국가에 대해 충격에 빠져 있었다. 나는 올리브 산에 사는 몇몇 아랍 이웃들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난 곧 그들이 내 인간 관계에 대해 질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한 가정을 방문하면, 다른 가정도 방문해야지 안 그러면 화를 냈다. 그 지역 아랍인들은 31년간 영국 통치 아래, 19년간 요르단 통치 아래 살았다. 일단 그들은 영국 위임령 하에서 아랍인으로 살았고 이후엔 요르단 국적의 아랍인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유대 국가의 주민이 된 것인데, 이스라엘은 극렬한 원수라는 이야기를 한참 들어왔던 상태였다. 그들은 당시 새로운 행정관 하에서 아주 예의바르게 운전을 했다.

나는 대학교 때, 그리고 유럽에서 살면서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었다. 그래서 언어에 대한 열정으로 다큐멘터리 대본 작업을 하는 동안 몇 달 간 재미삼아 히브리어를 배우기로 했다. 이민자들이 떼로 들어오는 가운데, 울판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학교들은 사방에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현실 속에서 많은 현지 아랍인들 역시 히브리어를 배우기로 했다. 특히 자신의 장사나 커리어를 위해 히브리어를 배우려는 아랍 사장들이나 관리들도 있었다. 울판에서는 첫째 날부터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히브리어만 사용했다. 교실은 언제나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교수를 할 공통의 언어가 없었다. 그러니 히브리어가 당연했던 것이다.

우리 선생님 요나는 이스라엘 출생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홀로코스트 당시 수년 간 폴란드의 숲 속에 숨어 생존한 몇 안 되는 폴란드 유대인들 중 하나였다. 부부는 5개 아랍 국가들이 신생 국가를 쳐들어온 1948년 독립 전쟁에서 함께 싸웠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부대를 이스라엘의 적들로부터 기적적으로 구해주신 일들을 많이 이야기해줬다. 그녀는 친구가 되었고, 나를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소개해줬다.

1968년 5월 17일은 예루살렘 수복 1주년이자 독립 20주년으로 예루살렘 거리에서 대단한 군인 행진이 있었다. (키스톤 프레스/알라미 스탁 포토)

나는 민족과 문화에 대해 배우는 데에 여러 달을 보냈다. 올리브 산은 주로 아랍인들이 사는 동네였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보냈기 때문에, 곧 예루살렘의 서부로 이사를 했다.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때까지도 생생한 기억이었다. 많은 가게 주인들은 팔에 나치가 문신으로 새긴 수감 번호를 보여줬다. 그들 가운데는 독일어를 모국어로 배운 이들이 많았지만, 평생 다시는 쓰고 싶지 않아 했다. 그들은 독일 제품이나 차는 결코 사려 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들은 수용소의 악몽 속에 살고 있었다.

예루살렘이 하나로 수복된 가운데, 구도시는 생기가 가득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골목과 좁은 길들을 가득 채우며, 손이 닿는대로 다 사들였다. 상점들에서 동네 아랍인들은 다마스쿠스에서 온 오리엔탈 장식품이나 파키스탄에서 온 양탄자, 그리고 이전엔 이스라엘인들이 살 수가 없었던 다른 물건들을 팔았다.

1967년과 1973년 사이,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와 작은 마을에서는 즉흥적으로 호라를 추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정부 공보실 - 이스라엘)

전무후무한 독립

5월 14일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이스라엘 독립 기념일이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유대력으로 독립 기념일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1968년 독립기념일은 5월 17일로 정해졌습니다. 예루살렘 해방 이후 처음으로 열린 독립 기념일 행사였죠. 온 나라가 전율에 휩싸였습니다. 저는 집에서 구시가지로 걸어가는데 50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1년 전에 작곡된 노래인 '황금의 예루살렘'을 자발적으로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통파든 세속파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의 날이 가까워졌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전날 저녁, 나는 벤예후다 거리를 걸으며 호라를 추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았다. 블록, 블록마다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리 위의 발코니마다, 1m 간격으로 떨어진 연주자 그룹들이 아코디언과 기타로 이스라엘 음악을 연주했다. 그들은 그 땅-갈릴리 호수, 언덕과 산들, 밀밭과 포도, 사과 꽃-을 사랑하는 노래들을 불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친백성으로 택하신 것에 대한 노래들도 있었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용감한 군인들에 대한 노래들도 있었다. 그 첫 번째 독립기념일에 표출된 이스라엘인들의 기쁨은 내가 태어나서 본 적이 없고 이후에도 못 본 것이었다.

마른 뼈

대본을 스스로 쓰려는 수개월 간의 시도 끝에 나는 성경에 이미 만들어진 스토리라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유대인들이 고토로 귀환함, 하나님께로 돌아옴,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는 구절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하나 5x7 인치 카드에 적어두었다. 결국 나는 거의 30cm에 달하는 카드 더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을 베끼고 정렬시키는 데에는 거의 1년이 들었지만, 이 구절들은 내 마음에 새겨졌고 지난 50년 이상 나를 이끌어온 내 영혼의 DNA가 되었다. 부분적이나마 이스라엘과 서구 세계 가운데 예언적 전개를 이해하는 내 이해의 기초가 되었다.

1969년, 촬영을 시작하기 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스라엘 최고의 예술가 3명을 선물로 주셨다. 첫째, 아담 그린베르그 (이후 터미네이터 2 촬영으로 오스카 후보가 됨), 둘째, 유명한 이스라엘 배우 요시 야딘,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노암 셰리프는 영화 음악을 맡아주었다. 마른 뼈라는 영화는 유대 민족이 고토로 귀환하여 메시아를 알아보게 되는 과정을 다뤘다. 요시 야딘은 골다 마이어 총리에게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총리는 관람을 요청해왔다. 영화를 다 본 총리는 생각에 잠겨있다가 내게 물었다. “이 영화에 나온 구절들 가운데 타낰흐(구약 성경)의 것은 어떤 것이고 신약의 것은 어떤 것인가요?” “전부 다 타낰흐 구절들입니다.” 나는 대답했다. 나는 그녀와 2시간 이상 시간을 보내며, 영화를 보여주고 이사야 53장을 설명했다.

쉬라는 어려서부터 사진에 관심이 있었고, 결국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 되었다.

그 때쯤 나는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의 아들로 당시 70대였던 에후드를 만났다. 나는 당시 이스라엘에 산 지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한 선구자였는지 알지를 못했다. 그는 2천년 간 거의 사라졌던 히브리어를 부활시킨 핵심 인물이었다. 아쉽게도 자신의 꿈이 이뤄지는 것을 보기 전 운명했지만, 현대 이스라엘 국가 건국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우리는 헬라어로된 신약을 히브리어로 새롭게 번역하는 것에 대해 에후드와 이야기했다. 그는 실제로 그 작업을 몇 달간 했는데 중단했다고 했다. 그러한 책의 저자로 알려지게 되는 것이 감당하기 버겁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쉬라는 이스라엘의 초기 지도자들을 많이 만났다. 이것은 쉬라가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 구리온을 만난 사진이다.

그리고 나를 알게 된 그들

어느 날, 나는 친구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그는 올리브 산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 친구는 잉글랜드 출신의 아가씨 사라와 막 만난 상태였다. 사라는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당시 막 예슈아를 믿게 되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이민 하라고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스라엘에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아주 적었기에 나는 방이 하나 남는 우리 집에 와서 지내라고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1년 반을 같이 살았다.

나는 몇 주간 미국을 방문해 복음주의 그룹들에게 이스라엘 강의를 해야 했다. 내가 떠난 동안, 메시아닉 유대인 청년 그룹 하나가 이스라엘에 투어를 왔다. 사라는 그들 중 하나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결혼을 하기로 했고, 미국으로 떠났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라에겐 예루살렘에 초정통파인 친척들이 꽤 있었다. 결혼 소식을 듣자, 그들은 격노했다. 그들은 내가 믿는 사람인 것을 알고 둘을 연결해준 나를 탓했다. 이스라엘에 돌아오고 며칠 뒤, 나는 신문에서 나에 대해 온갖 거창한 이야기들을 떠벌린 것을 알게 됐다. 나는 통곡의 벽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유대인 학생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려고 히브리 대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통곡의 벽이나 대학교를 한참 동안 못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은 이미 퍼져 있었다.

쉬라의 아버지 고든 린지가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으로 알려진 1973년 가버나움 회당에 서 있는 모습

얼마 지나지 않아, 3층짜리 우리 아파트 문 바로 밖에서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내 문 앞에 화염병에 불을 붙여 둔 것이었다. 계단이 건물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는데, 3층의 계단 전체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불타 죽을 것 같아 전화기로 달려가 경찰을 불렀다. 약 3분 만에 소방차가 도착했고, 불은 꺼졌다. 바로 그때 차를 타고 지나가던 기자가 들어와서 무슨 일인지를 살폈다. 나는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이 아마 내 신앙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 내 신앙에 대해 그에게 말했다. 다음 날, 이스라엘의 예디옽 아하로놑지에 큰 지면을 할애한 기사가 실렸다. 헤드라인 제목은 “쉬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을 거신다고 이야기"였다.

이후 수개월 동안, 나는 끝없는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는데, 내 신앙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랍비들이 문앞에 찾아와 나를 개종시키려 했다. 군대의 고위 간부는 내 신앙을 설명해달라고 했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기 전에 쉬라 씨의 전화를 확인했어요. 도청되고 있는 게 확실합니다.” 배우, 작가, 정통파 대학생들이 모두 내 신앙을 궁금해했다. 우리 아파트에 살던 이웃들 모두가 내가 믿는 바에 대해 말을 걸어왔는데, 그중 한 사람은 내 차가 폭파될 지도 모르니 절대 자신의 차에 가까이 주차하지 말라고 했다.

뉴스 앵커들은 라디오와 TV 출연을 요청해 왔다. 나는 대단히 고독감을 느꼈지만, 홀로 있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지 않아서 주변에 나와 함께 할 신자가 없나 찾았다. 현지 신자들은 너무나 위협감을 느꼈는데, 분명 그럴만 했다. 한 지도자의 차는 방화를 당했다. 그러나 나는 TV 인터뷰에 함께 해주겠다는 미국 출신의 믿는 유대인 2명을 찾았다. 종교적 유대인들은 시두르(기도서)를 가지고 기도하기 때문에, 진행자가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기도를 하는지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그래서 나는 TV에서 골다 마이어 총리를 위해 기도를 했다.

하지만 미혼 여성으로서 항상 문앞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사는 건 아주 겁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1973년 3월, 나는 가족들과 시간도 보내고 YWAM과 진행하고 있던 영화도 마무리 할 겸 갑자기 달라스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주에 남아있는 표는 3월 28일 수요일 것 하나 뿐이라고 들었다. 나는 당시 너무나 유명해져서 어떻게든 조용히 떠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기자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떠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간청했다.

60년대 중반의 린지 가족. 왼쪽부터: 프레다(쉬라의 어머니), 길버트, 데니스(쉬라의 형제들), 고든(쉬라의 아버지)과 쉬라

난 목요일 저녁에 달라스에 도착했다. 일요일 아침에 어머니는 예배 때 말씀을 전하셨다. 유대인 학생으로서 나와서 간증을 해달라고 요청하셨는데, 뒤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무대 위 의자에 앉아계셨는데, 깊은 숨을 내쉬고는 소천하셨다.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아직 애도하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이스라엘 뉴스에서 내가 추방을 당했다고 한 기사를 보내주었다. 분명 그 기자는 조용히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신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그 기사를 읽어주었고, 그중 한 기도의 용사가 상황에 대한 강력한 기도를 이끌어냈다. 그 이후로는 그런 소문이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1973년 10월 6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으로 끔찍하게 침공했다. 그 전쟁은 예루살렘 해방 이후 이스라엘이 맞은 6년 간의 행복한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6일 전쟁이 기적과 경이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욤 키푸르 전쟁의 여파로 2,412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죽었고 이스라엘 전역에는 아직도 상흔이 남겨져 있다. 이스라엘은 결국 전쟁에서 이겼다. 욤 키푸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의 가장 거룩한, 금식과 기도의 날에 동시에 공격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그 끝에 멸망이, 그리고 사망자 명단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1967년 이후의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그 문화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경건하게 메시아의 오심을 속삭였고, 의기양양한 춤과 노래가 거리를 채우던 그 모습은 이제 영영 사라졌다.

이스라엘의 주요 신문 예디옽 아하로놑이 1973년 욤 키푸르 아침에 있었던 공격을 보도

이스라엘의 햇병아리 공동체

이스라엘에 정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빅토르 스마쟈라는 선구적인 유대인 목회자를 만났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공동체를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작은 모임이 몇 개 있었지만, 규모와 위치 때문에 그들의 공동체는 예루살렘의 메인이 되었다. 예루살렘에는 아주 작은 규모의 유대인, 아랍인 신앙 공동체들이 몇 개 있었다. 그들은 빅토르와 함께 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아주 바람직한 움직임이었다. 이 모임은 예루살렘 최초의 진짜 메시아닉 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도 아주 역동적이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텔아비브 지역과 북쪽의 하이파에도 작은 모임들이 있었다. 그러나 물론 당시 기술 발달을 고려해보면, 서로 간에는 소통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예루살렘의 내 방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텔아비브로 이사가야겠다는 감동이 압도적으로 밀려왔다. 나는 며칠 동안 그 생각을 두고 봤지만, 사라지질 않았다. 나는 라마트 하샤론이라는 한 작은 마을에 아파트를 찾았는데, 널따란 딸기 밭으로 유명한 동네였다. 텔아비브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어, 그 지역의 믿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요셉 슐람이 그중 하나였고, 그를 통해 나는 로드 출신의 아랍 대학생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여러 이스라엘 군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예슈아에 대해 관심을 보였고, 요셉이 수업을 통해 그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요셉이 미국에 방문을 해야 해서 나에게 성경 수업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히브리어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내 히브리어 수준은 말이 빠른 군인들을 당해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그냥 단순하게, 예슈아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쳤다. 곧 한 명 한 명, 예슈아를 영접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후 우리는 내 히브리어가 그 친구들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지 못해서 그냥 조용히 듣다가 주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의 아들 에후드 (이스라엘 기록 보관소)

문제는 요셉 슐람과 내가 그들이 만나본 유일한, 거듭난 유대인이라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계속 질문을 했다. “다른 믿는 유대인들은 어딨죠? 세상에 우리 뿐인가요?” 그래서 나는 그들을 소개해 줄 다른 믿는 이들을 찾아야겠다고 느꼈다. 나는 동네 호스텔에 머물고 있는 잉글랜드 출신의 “히브리 크리스천"들이 몇 명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와! 유대인으로서 예슈아를 믿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해줄 기회다!” 그래서 찾아갔다. 날씨는 좋았고 우리는 정원에서 몇몇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4~5명의 군인들이 안에 들어갔다. 곧 그들은 화가 잔뜩 난 채로 나왔다! 그들은 영국인들이 모여있던 로비에 들어갔는데, 테이블에 커피와 쿠키가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대단히 “환영합니다! 마음껏 드세요!” 식의 문화라서, 이 친구들이 마음껏 먹은 것이다. 그런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나가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응접실에서 쫓겨났다.

나는 호스텔로 달려 들어가 무슨 일인지 확인을 하려 했다! 내가 질문을 하자, 영국인들은 사과를 해왔다. 그들은 군인들이 믿는 사람인 걸 몰랐다는 것이다. 그냥 길 가다가 쳐들어온 사람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믿는 이스라엘 군인은 본 적이 없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래서 나는 군인 아이들을 찾아가 상황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어느 때보다 화가난 모습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이런 게 믿는 사람이라고요? 길에서 찾아온 사람이라고 착각했으면 이렇게 대접하는 거에요? 그런 사람에게 커피 한 잔도 못 줘요? 그런 게 믿는 사람이에요?” 나는 살면서 너무나 좋은 신자들을 많이 보았기에, 이들이 그토록 안 좋은 경험을 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골다 마이어는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로 상당한 엘리트였다. 그녀의 깊은 지혜의 말들은 자주 인용된다. (알라미 스탁 포토)

몇 주 후, 나는 덕망 있는, 치유 은사로 알려진 사역자가 이스라엘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적과 이사가 유대인들에게 먹힌다는 건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이었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와! 아이들을 이 예배에 데려가야지.” 그리고 모임은 주로 관광객 대상으로, 영어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기적이 나타날 것이었다. 그들은 예슈아께서 진정 우리와 아버지 사이의 중보가 되시며, 참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었다.

예배는 텔아비브의 한 대형 야구장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나는 앞자리를 확보하여 아이들이 주님의 역사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시간 정도 일찍 나섰다. 가장 먼저 도착하여, 앞줄을 차지했다. 예배가 시작하기 직전, 사람들은 자리를 채우고 있었는데 한 독일인 그룹-그렇다, 독일인-이 왔고 투어 가이드가 우리에게 자신들의 자리이니 비켜달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주목 받을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말했다. 최근에 주님을 영접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왔고, 그들이 가까이서 이 집회를 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뭐, 나도 안 받아주기로 했다. 우린 꼼짝 않았다. 왜 그 자리가 자기 것이라고 그가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10분 동안 모든 사람 앞에서 우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1974년, 당시만 해도 홀로코스트가 지나고 오래지 않았을 때라 이 상황은 우리 친구들에게 그 날 밤까지 우울감을 안겨주었다. 예배는 잘 끝났지만, 기적은 없었다. 군인들은 그들이 만나본 소수의 신자들에게 큰 상처를 받았다. 믿음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요셉 슐람이 귀국을 했고, 우리는 이 친구들이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한다면, 왜 미국의 믿는 유대인들은 전부 이스라엘로 오지 않죠?” 

나는 그들이 카메라를 쳐다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까지 촬영을 했다. “지금 믿는 유대인으로서 미국에 살면서 이것을 보신다면, 이스라엘로 와서 여기 신앙 공동체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게 어때요?” 그러나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믿는 유대인 청년은 더 이상 없었다. 천천히, 그들은 예슈아를 향해 가졌던 열정을 잃어버렸다. 어느 순간, 요셉과 나는 광야에 나아가 이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토해놓았다. 그러나 하나 하나 그들은 떠나갔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고토의 신성함에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성경으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것은 전혀 새로운 도전이었다. (알라미 스탁 포토)

튼튼한 중심

그 비극적 사건들은 나를 결단의 순간에 이르게 했다.

생동감 있는 신앙 공동체를 반드시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강력한 신자들의 핵을 세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 뿐이었다. 내가 계속 안 믿는 이스라엘인들, 즉 히브리어를 하면서 이스라엘 문화를 알지만 하나님 왕국의 문화를 바닥부터 배워야 하는 이들을 데려오려 하는 것이다. 아니면 전 세계 다른 곳에서 믿는 유대인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주님 안에서 성숙하였지만, 이스라엘의 언어와 문화를 바닥부터 배워야 하는 사람들 말이다. 둘 다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또한 그때까지 이미 한 가지 선택지에 있어서 실패했다는 것도 알았다.

때는 1976년 늦은 봄, 나는 미국에 가서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들을 찾기로 했다. 이스라엘에서 살고자 하는 비유대인 기독교인은 많았지만, 그들은 특별한 사업이나 기술이 있든지 유대인과 결혼을 해야만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설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에 강한 몸을 세우려는 비전에 대한 저의 강연을 듣고 이스라엘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제 연설 중 하나는 제 영화 '드라이 본즈'를 본 적이 있는 잭 헤이포드 목사의 밴 누이스 교회에서였습니다. 머물 곳이 필요했던 저는 할리우드 리포터의 신자 잭 이스트가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오면 가족과 함께 지내라는 초대를 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리는 많은 영화에서 연기했다. 이것은 그가 이스라엘에 돌아올 때까지 출연했던 칩스의 첫 시즌으로 에릭 에스트라다, 래리 윌칵스와 함께 세 번째 경관으로 연기한 작품이다.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언젠가 이스라엘로 이민갈 거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듭난 유대인 배우를 얼마 전에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나는 알리야 후보자를 찾고 있었기에, 그에게 전화해 보라고 잭에게 부탁했다. 잭은 그의 명함을 갖고 있었고, 곧 전화를 걸었다. 나는 일요일에 잭 헤이포드의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다음 월요일 아침에 떠날 것이었다. 그래서 기회는 상당히 제한적인 듯 보였다. 그러나 그날 오후쯤, 잭의 전화가 울렸다. 우리가 연락하려 했던 바로 그 배우였다! 둘은 식당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이고 그는 잭의 명함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어떻게 잭의 번호를 기억하여, 난데없이 전화를 해온 것이었다. 모두가 당시는 그를 R.B.라고 불렀다. 현재 그는 아리 소르코람으로 통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는 잭의 집에 왔다. 나는 그에게 군인들이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로 올 것을 촉구하는 영상을 보여주고, 그 다음으로는 내가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과 함께 므기도 발굴 현장에서 만든 영상을 보여줬다. 아리는 분명 이스라엘에 가는 것에 대해 크게 신나는 모습이 아니었다. 다만 기도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나의 첫 열매

아리와 다른 젊은이 디나, 그리고 그녀의 6살짜리 아들은 모두 이스라엘로 이민 온 믿는 유대인들, 내가 거둬들인 수확의 전부였다. 그러나 얼마나 놀라운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그가 나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여 나는 약간 낙망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알던 친구 조엘 처노프가 나의 좌절을 보고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이 친구는 완전 새로운 나라에 왔잖아. 좀 시간이 필요할 거야. 기다려봐!”

그리고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야포의 한 카페에서 나에게 청혼했다. 우리는 믿음 때문에 엄격한 초정통파 랍비 기구가 이스라엘내 혼인을 전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을 알고, 텍사스 달라스 최대의 회당인 임마누엘에서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 이름이 얼마나 절묘한가!

아리, 쉬라 그리고 큰 아들 아얄

12개월이 되지 않아, 우리는 마오즈 이스라엘을 설립했고 첫 아들을 출산했다.

그때부터 진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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