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자살 폭탄 테러와 살인으로 악명 높은 제1차 인티파다의 지옥을 겪고 있었다. 1987년 이슬람 폭동이 중심무대에 올랐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죽음의 계곡의 그늘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몇 년 동안, 한 국가로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생존 상태로 살아왔다.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은 자살 폭탄 테러범과 창의적인 살인범들에게 촉구했지만, 그들이 어디에 나타날지 아무도 몰랐다. 오늘날의 코로나 바이러스와 약간 비슷한 것이었다. 위험이 닥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불과 15년 전, 이스라엘 정부는 지브릴 협정에 서명하여 3명의 이스라엘 군인과 교환하는 대가로 1,150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석방했다. 그 테러리스트들 중 다수는 제1차 인티파다 지도부의 중추를 구성했다.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역사는 제1차 인티파다가 7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테러를 겪으며 살아온 우리들에게 현실은 테러리스트들이 폭탄, 칼, 자동차, 트랙터로 20년 동안 우리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첫 7년 동안, 233명의 이스라엘 민간인과 60명의 IDF 군인들이 오로지 폭탄에 의해서만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1,400명의 이스라엘 민간인과 1,700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라파트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테러는 어디에서나 닥쳐올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 취약했던 버스 이용을 그만두었다. 우리는 어디든 아이들을 차로 태워다 주었다. 집은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1992년 제1차 인티파다가 한창이던 당시 총리로 선출된 이쯬핰 라빈은 폭력을 종식시키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의 계획은 야세르 아라파트와 화해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라빈의 팀은 비밀리에 아라파트와 협상했고 라빈은 1993년 악명 높은 오슬로 1차 협정에 서명했다. 그후 폭력은 너무 시들어서 강한 시온주의자인 이스라엘인들조차 나라를 분열시키는 것이 폭력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다면, 아마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 있어서는 정서적으로 어려운 시간이었다. 성경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이 작은 땅을 유대인들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우리 총리가 기꺼이 이슬람 국가를 만들기 위해 "이스라엘의 산"을 넘겨주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성경이 이스라엘의 땅 문서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결국, 모든 것이 허사였다. 오슬로 협정은 모두 주기만 하고 받은 건 없는 결과를 낳았다. 서서히 증발했고, 우리는 정부가 마침내 팔레스타인 주민과 이스라엘 주민을 분리시키는 장벽을 세울 때까지 이러한 공격 속에 고통 당했다. 하지만 장벽이 생긴 것은 훨씬 나중 일이었다.
1993년 이쯬핰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수반이 빌 클린턴 대통령과 첫 오슬로 협정에 서명한 후 악수를 나누고 있다. 크레딧: Shutterstock/Mark Reinstein
우리의 자리를 찾아서
1991년, 미국에서 2년간 지낸 후,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한 공동체까지 매주 왕복했고, 예루살렘 지역으로 이사하려는 계획을 계속했다. (2021년 4월자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전쟁, 이민자, 그리고 훈련 센터 참조) 하지만 텔아비브의 교외인 라마트 하샤론에 남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는 텔아비브에서 예배할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 지역에는 몇 개의 큰 개척자 그룹이 있었는데, 결국 우리는 다비드 라자루스가 이끄는 자파의 성령 충만한 공동체을 선택했다.
그곳에는 강력한 임재와 자유로운 예배가 있었다. 예배는 많은 새로운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여러 언어로 통역되었다. 다비드는 또한 주님께서 주신 전도하고 가르치라는 소명을 열렬히 독려하는 사람이었다. 아르니와 요니트 클라인은 그때쯤 이스라엘로 이민을 와서 우리의 가까운 동료가 되었다. 우리는 함께 텔아비브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꿈꾸고 계획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리더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합니다.
메시아닉 선구자들을 섬기며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끊임없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역 메시아닉 공동체 내에 필요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많은 지도자들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그들의 열정적인 노력도 보았다. 이스라엘에서 주님의 몸을 섬길 기회를 기도하고 있었는데 캘리포니아에서 온 서프라이즈가 우리 무릎에 떨어졌다. 1994년, 비전 있는 목회자 톰 바키가 이스라엘에서 열린 3일간의 컨퍼런스에 강사로 서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목회자와 지도자를, 배우자와 함께 텔아비브 바로 북부 헤르찔리야의 아름다운 호텔로 초대하라고 요청했고,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
몇몇 지역 지도자들은 평생 호텔에 가본 적이 없었다! 톰 바키는 아랍 크리스천 지도자들의 대표단을 비롯하여 100명의 지도자들과 사모들에게 진심으로 사역했다. (이것이 많은 아랍 목회자들과의 긴밀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피드백으로 볼 때, 이 컨퍼런스는 대성공이었다. 이스라엘 형제 자매들의 얼굴에서 본 갈급함은 하나님께서 심어두신 이스라엘의 개척자들, 특히 종종 큰 역경과 맞서 싸우던 메시아닉 지도층은 격려와 정신적 영양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 신실한 지도자들은 흠뻑 흡수하고, 쉬고, 말씀을 받고, 놀라운 교제를 나누었다. 다양한 신념과 신학적 관점을 가진 이들이 모였고, 많은 이들이 이 컨퍼런스를 시작으로 새롭고 지속적인 우정을 쌓았다.
우리가 주최한 다음 컨퍼런스에도 캘리포니아 출신의 잭 헤이포드 목사가 2년 연속 주강의를 했다. 잭 목사가 비용의 절반을 후원했고, 마오즈가 나머지 절반을 모금했다. 아들의 특수교육 필요 때문에 미국에 있는 동안 교인들을 가슴 아프게 잃고 난 후, 우리는 이 컨퍼런스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연합의 영향력을 보면서 크게 고무되었다.
텔아비브 봉사 활동에서 '구도자' 역할을 마임으로 표현하는 아얄 프리덴
사랑으로 러시아에
1994년 가을, 우리는 조나단 버니스가 수만 명의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주님께 돌아오는 대규모 메시아닉 아웃리치 콘서트를 열었던 러시아로 초청을 받았다. 많은 러시아 도시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적어도 25만 명이 공개적으로 서서 기도하라는 부름에 응하는 것을 보았다. 제출된 후속 연락 카드를 기반으로 볼 때 50%는 유대인이거나 적어도 한 명의 유대 조부모가 있었다. 조나단은 이 놀라운 각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제자 훈련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첫 성경 학교는 108명의 학생들과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문을 열었다. (이들 중 여러 새로운 유대인 신자들은 후에 이스라엘로 알리야했고 메시아닉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조나단은 새로 생긴 성경 학교에 우리를 강사로 초대했다. 우리는 거기서 일주일을 보냈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쏟아 부었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에서부터 모세, 메시아 예슈아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기초 진리를 가르쳤다. 내 어머니(프레다 린지)는 당시 엄청난 수확이 이뤄졌으니 잠시 러시아로 건너가 제자 삼는 사역을 도와야 한다고 우리를 불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프레젠테이션 내내 집중해 앉아있던 디젠고프의 꽉 찬 계단 한 부분
잃어버린 도시 텔아비브
하지만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돌려 주님께 묻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텔아비브의 잃어버린 양떼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동역자 아르니와 요니트와 함께 음악과 길거리 연극 공연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디젠고프 광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아웃리치를 구현할 것이었다.
첫날밤이 왔다. 우리는 인도에 "무대"를 설치했다. 스피커, 믹서, 조명, 악기. 배경은 두 나무 사이에 걸려 있었다. 우리 앞의 계단은 분수대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원형 극장을 형성했다. 버스와 차들이 연기를 내뿜고 경적을 울렸다. 텔아비브의 중심부에 있는 이 큰 도시 광장 주변에서, 작은 가게들은 팔라펠, 아랍식 피자, 스무디, 그리고 회전대에 걸린 양고기 슈와르마를 팔았다. 무대 조명을 켜자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편, 두 블록 떨어진 아비 미즈라히의 두깉 메시아닉 서점과 아웃리치 센터에서는, 그와 자원자 일행이 그날 저녁 활동을 두고 기도하기 위해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모였다. 오후 7시, 그들은 시작할 때까지 기도하기 위해 광장에 도착했다. 전국에서 중보자들이 왔다.
오후 8시에 우리 밴드는 연주를 시작했고 몇 분만에 계단들은 꽉 찼다. 심지어, 난간을 따라서도 사람들은 가득 찼는데, "쇼"가 보이는 가장 먼 곳에까지 사람들이 있었다. 한 구석도 비지 않았다. 심지어 비집고 들어가려고도 했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도 많았다.
아르니가 색소폰 "주님과 같은 분이 누구리이까Who is like thee O Lord"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공기 중에 전율이 느끼졌다. 밴드가 몇 곡을 더 연주했다. 선구적 리더인 에이탄 쉬쉬코프는 드럼을 연주했고 나는 건반을 연주했다. 밴다나와 야구모자를 쓴 우리는 "종교"를 전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우리가 그것으로 우리 왕께 경배하는 줄 모른 채, 그 음악을 좋아하였다.
마지막 곡으로 아르니는 밥 딜런 스타일의 창법으로 히브리어 번역된 마지막 후렴구를 마무리했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다.
그들은 유수 중에 죽었다.
우리는 우리 나라에서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 영혼 안에서 죽어가고 있다.
바로 이어서 연극이 시작됐고 전문 댄서이기도 했던 메시아닉 리더 아얄 프리든을 등장시켰다. 그는 세상이 쥐어주는 모든 것을 시도하다가 결국 완전히 포기하기 직전에 하나님께 의지하는 "구도자"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연극의 마지막에, "구도자"는 일상 쇼핑객에서부터 마약 중독자와 주정뱅이, 군인, 노숙자 여피족, 심지어 홀로코스트 생존자까지 온갖 사람들이 모인 군중에게 커다란 거울을 비춰주었다. 그리고 나서 아리는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절망 속에 있는 자들을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지에 대해 말했다.
전국에서 신자들이 이 행사를 목격하기 위해 왔고 굶주린 사람들과 생명의 빵을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군중들 사이에 앉아있다가 드라마가 끝난 후 계단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둘째 날 밤, 우리는 관심자들을 두어 블록 떨어진 두깉 커피 하우스로 초대했다. 25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아비 미즈라히와 함께 도착하여 사람들을 앉히고 읽을 자료를 주었다. 셋째 날 밤, 두깉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완전히 홍수처럼 가득했다. 3일 밤 동안, 300명 이상의 텔아비브인들이 예슈아에 대해 더 듣기 위해 두깉으로 왔다.
모든 의자와 테이블은 갈급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각자의 비탄에 대하여 말했고, 메시아 예슈아의 구속의 보혈에 대한 복음을 들었다. 800~900명 사이의 사람들이 음악 연극을 30분간 앉아서 지켜보며 어떻게 우리 메시아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주셨는지 설명을 듣고, 회개할 것을 촉구 받았다.
텔아비브, 네타냐, 하이파, 예루살렘에서 온 12명 이상의 목사들과 지도자들이 아웃리치에 참여했다. 이 사역은 우리에게 전환점이었다. 스스로 계획하고 있던 아웃리치 외에도, 우리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닉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과 협력하여 아웃리치를 진행했다. 우리 모두가 이해했고 고통스럽게 명백해진 것은, 이 추수에 함께할 일꾼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1994년 10월, 우리가 처음 아웃리치를 한 지 6개월 후, 한 자살 폭탄 테러범이 우리가 공연했던 디젠고프 거리를 지나는 버스에서 자폭했다. 이스라엘인 21명과 외국인 1명이 사망했다.
이런 위험한 환경에서 거리 아웃리치를 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1994년 12월부터 6개월 동안 한 달에 3일을 금식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마오즈 독자들,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을 초청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기도하며 금식을 하겠다고 전해왔다.
두짓 커피숍은 방금 본 드라마에 대해 질문하는 이스라엘인들로 몇 시간 동안 넘칠 정도로 붐볐습니다.
해야 할 결정
1995년 5월, 우리는 7개의 공동체와 함께 예루살렘의 약간 다른 상황에서 두 번의 공연을 했다. 이러한 공연이 적대적인 예루살렘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큰 기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독자들이 컨퍼런스와 아웃리치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땅의 안보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다음 공격이 어디에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1994년,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점점 더 절박해지고, 망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데 더 개방적이 되어가고 있다. 때가 왔다."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리더들이 함께 보낸 시간부터 대연합이 꽃피기 시작했다. 이제 이 거리 아웃리치에서 열매를 맺을 때가 된 것이었다.
여름에 우리는 텔아비브의 중심부에서 또 다른 3일 동안 이어지는 뮤직 드라마 홍보 행사를 열었다. 전년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관심자들(일부는 정말 간절히 구하고 있었다)을 어떻게 돌볼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완전히 히브리어로 된 이스라엘 공동체가 필요했다. 잃어버린 이스라엘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히 담기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 스스로 배가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는 공동체 목회를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었다.
아리(Ari)와 시라(Shira)는 두 차례의 국가별 리더 컨퍼런스에서 잭 헤이포드를 초청했습니다.
개척자답게 개척을 하라!
어느날 밤 아리와 나는 거실에 앉아있었다. 내가 말했다. “여보, 다른 공동체 시작할 생각 해본 적 있어요?” 아리는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해봤지."
우리는 수십 년의 친구이자 마오즈의 이사인 폴 리베르만과 이야기를 나눴다. 미국,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 공동체의 메시아닉 리더인 그는 또 매우 성공적인 사업가이자 전략가였다.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주님께서 주신 여러 가지 사명으로 개척을 했잖아요. 예를 들어, 정부가 믿는 자들의 이민에 매우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많은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알리야 하도록 돕는 일을 개척했죠.
또 이스라엘 전국의 리더들을 모아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경험과 지혜가 있는 사역자들 밑에 앉혔습니다. 또 개척자들 간에 친분을 다짐으로써 우리 리더들의 연합을 도모하고 전국에 널리 분산시키는 데 힘썼죠.”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는 러시아어, 영어, 암하라어, 아랍어, 그리고 심지어 스페인어로 모이는 공동체들이 있어요. 하지만 히브리어로만 소통하는 곳은 거의 없죠.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들은 완전히 이질적인 서구 현상이라고 보는 이스라엘의 문화적 장벽을 돌파하는 데 항상 참여하고 싶어했잖아요? 그리고 항상 사브라(토박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에 가장 큰 열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두 분은 성령으로 충만한 히브리어 공동체를 일으켜 성령의 은사를 실천하고, 성경적 유대 절기를 기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신자들과 구도자들이 두 분이 인도하는 예배에 올 때, 언어와 문화에 완전히 편안함을 느낄 거에요.”
방 안의 코끼리: 불편한 그 존재
폴이 이 말을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계시로 주신 것을 곧장 알았다. 리얼리티 체크.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데 유익한 여러 가지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폴은 우리에게 가장 불편한 방 안의 코끼리에 집중하기 위해 가장 깊은 욕망에 레이저 광선을 비추었다. 우리에겐 행진 명령과 하나님 왕국을 위한 과제가 있었다.
텔아비브 지역의 공동체 목회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에게 우리가 라마트 하샤론에서 새로운 "히브리어 전용" 공동체를 시작할 것이라고 느꼈다는 것을 알렸다. 전도하고 새로운 신자들을 훈련시키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들은 모두 우리를 축복했고 우리의 시작을 격려했다.
우리의 작은 팀인 아르니, 요니트, 그리고 다른 신자인 약사 하나와 함께, 라마트 하샤론 공동체는 1995년 9월 24일, 이스라엘의 새해 5756년으로도 알려진 나팔절 전야에 첫 모임을 가졌다. 그 공동체는 결국 티프에렡 예슈아(예슈아의 영광)로 이후에 이름이 바뀌게 된다.
우리 공동체가 태어난 날,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는 이집트에서 만나 오슬로 2차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미래의 팔레스타인 국가에 대한 이스라엘의 의도를 최초로 문서상 확고히 했다. 이후 몇 달 동안 그 서명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가 금세 증명되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