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교 2학년을 막 시작했을 때, 월남전에 반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중퇴했다. 마리화나, 블루스 록 밴드, 그리고 더 많은 마약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그후 나는 인생의 반려자 코니를 만났고, 1969년에 결혼했다.
우리는 행복하게 제대로 히피 생활을 하며, 뉴멕시코 북부의 아름다운 산지에 둥지를 틀고 있는 몇몇 코뮌에서 살았다. 독실한 유기농 농부였던 나는 6년 동안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전력을 다해 농사를 지었다. 돌과 진흙으로 만든 원룸 집을 지었는데, 나바호 인디언 스타일로 전기나 실내 배관이 없었다. 내 인생철학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범신론, 동양 신비주의, 점성술, 성선설, 그리고 충분히 노력한다면 나만의 순수함을 창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비극이 우리의 삶을 덮쳤다. 아주 소중한 친구가 냉혹하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흐물흐물했던 내 철학은 왜 친구의 삶이 그렇게 잔인하고 잘못되게 끝났는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했다. 나는 진이 쫙 빠졌다. 갑자기 나는 친구가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진정으로 순수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아내 코니는 두 명의 흥미로운 히피들을 만나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했다. 앉아서 또르띠야와 콩으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의 눈으로, 그를 보았다. 더 이상 주변의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십자가 상의 예슈아를 본 것이다. 그의 눈은 내 눈 위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의 사랑이 나에게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이었다. 갑자기 그의 고통이 세상의 불의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또한 내가 그토록 바라던 순수한 삶을 살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그분의 대응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인생이 변화되는 경험을 했다. 아내 코니는 이미 이 두 명의 예수 믿는 히피들이 자신에게 전해준 것을 몰래 믿고 있던 상태였다. 우리는 회개하고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이키지 않았다.
예수는 유대인
우리 부모님은 성경을 "우화"라고 생각했고, 사후의 삶은 결코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고 봤다. 1972년, 코니와 나는 그가 진짜라는 것을 깨닫고 예슈아를 믿게 됐다. 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유대인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구약과 신약은 항상 전혀 다른 신에 대한 묘사로 분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복음서에서 최후의 만찬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이 식사가 모세 시대에 우리가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축하하는 유월절 세데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나에게 성경은 두 권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리고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도 유대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히피 시절의 에이탄과 코니 쉬쉬코프 부부
유대인이라면 이스라엘 편?
1977년, 나는 쉬라 소르코람이 믿는 유대인들에게 알리야 할 것을 호소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하나님의 계획에 흩어져 있던 모든 나라로부터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모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내 공책의 여백에는 이렇게 기록됐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언젠가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살게 될 것이다."
돌아보니까 그것은 심오한 전환점이었다. 쉬라는 믿는 유대인인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회복/부활에 관한 말씀들을 검토해보라고 대담하게 도전했다. 쉬라는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의 구절을 가리키며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 순간, 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이 드라마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주에 적절한 타이밍은 15년이 흐르고서야 이르렀다. 때가 되자 우리는 매릴랜드 주에서 성황을 이루던 메시아닉 유대인 공동체 베스 머사이아에 장로로서 섬기기도 했다. 그리고는 평생 직장 동료들을 떠나게 된다. 그 당시 우리 가족 중에는 대학생인 아들과 딸이 있었고, 아브라함의 줄임말인 아비라는 이름의 활동적인 네 살짜리 아이가 있었다.
40대 중반이 되어 우리가 함께 20년 이상 동안 어떤 소지품을 싸야 할지, 이스라엘의 220 볼트에 맞게 어떤 가전 제품을 사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이러한 준비 과정 중에 코니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는 훨씬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 탄생의 시점부터 이스라엘 생활을 경험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너무 많았고, 실제 살아본 이들의 답변이 필요했다. 우리는 메시아닉 컨퍼런스들을 통해 소르코람 부부를 알게 되었고, 우리가 진행하던 시온의 관문(Gates of Zion) 라디오 방송에서 아리와 인터뷰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 생활에 대한 최신 정보를 듣고자 그들을 초대했다. 하지만 이 강렬한 변화 가운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그들의 끊임없는 격려였다.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 문화에 흡수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영어를 쓰는 다른 이민자들과 사업을 시작했다. "자동차 디테일링"이라는 이름으로 이동식 서비스를 시작했던 것이다. 범퍼, 대시보드, 전면 유리의 작은 손상을 수리하기도 했다. 힘든 일이었어다. 그리고 비록 아무도 떼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보도를 파올리는" 기초 공사와 이스라엘 고객들을 그들의 영역에서 만나는 데 보낸 나날들은 다른 데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현장 경험이 되었다.
현재의 에이탄과 코니 쉬쉬코프
물류창고에서 탄생하다
동시에, 우리가 시작한 가정 모임은 배가하여 여러 개가 되었다. 우리는 교제 대상을 찾고 있는 다른 메시아닉 신자들과 아직 믿진 않지만 곧 예슈아를 영접할 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힘을 합쳐 예배 공동체로 모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장소를 찾기 시작했고, 키리야트 얌("바닷가 마을"이라는 뜻)의 외딴 공장 지대에 있는 낡아빠진 창고를 지켜보고 있었다.
임대 계약을 하기 전에, 나는 그 건물로 돌아와서 기도하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주여, 저희가 있기를 원하시는 곳이 여기입니까?" 그러자 나는 "내가 마굿간에서 태어날 수 있는데 너는 왜 이 창고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음을 보지 못하느냐?"는 대답을 들었다. 우리는 그 장소를 빌려서 청소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첫 모임은 1995년 12월 3일이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비의 장막"이라고 불렀다.
60년대, 구원 받기 전 대학 시절에 내가 공부할 수 있었던 언어가 여럿이었을 텐데 나는 하필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그래서 100만 명 이상의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90년대에 이스라엘에 쇄도했을 때, 나는 하나님에 반대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막 탈출하여 영적 기근에 시달리는 유대인들을 섬길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갈릴리의 선구자로
자비의 장막 초창기에는 내가 많은 역할을 맡아야 했다. 처음에는 (히브리어, 러시아어, 약간의 영어) 예배를 인도했고, (내 풋내기 히브리어를 러시아어로 번역) 메시지를 전했으며, 참석한 사람들을 위한 교통수단을 제공했다(믿는 이민자 중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전 세계의 모든 회당에서 볼 수 있는 토라 두루마리를 샀다. 필사한 이 토라는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말씀을 담고 있다. 우리는 매주 그것을 읽기 시작했고, 항상 새 언약과의 필수적 연관성을 배웠다.
몇 년 안에, 감사하게도 우리 미국 공동체에서 온 두 동역자 가정도 알리야를 하고 신출 공동체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사역들을 합쳐주시는 모습을 보는 가운데 모셰와 카티야 모리슨 부부의 가르침의 은사는 우리 교인들이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에 깊이를 더해주었다.
마크와 레아 초핀스키 부부는 그보다 일년 후에 왔다. 레아는 기도의 용사였고 마크는 천재적인 음악가이자 작곡가였다. 메시아닉 선구자로서, 그는 영어권 메시아닉 운동계에 알려진 많은 곡들을 썼고 그중 많은 노래들을 히브리어로 번역했다.
자비의 장막 공동체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에이탄과 마크 초핀스키 목사
하레딤의 공격
1990년대 후반, 이스라엘 정부 구성원들은 우리가 예슈아에 대한 사랑을 나누고 예배할 자유를 반대하는 법을 통과시키려고 했다. 1997년 10월, 이전에 전국 메시아닉 청소년 컨퍼런스에 대한 선동적인 기사를 실었던 주요 신문이 이스라엘에서 성장하는 믿는 유대인들의 몸 전체를 향해 하레딤(초정통파 유대교인)이 선포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 전쟁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3일 후, 나는 전화 한 통에 잠이 깼다. "우리 건물에 불이 났어요! 어서 내려오세요!" 도착했을 때, 옥상에서 소방차와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 나는 본당에 보관하고 있던 소중한 토라 두루마리가 떠올랐다. 한 장로와 우연히 만난 나는 함께 그것을 무사히 꺼냈다.
여러 면에서 이것은 우리의 운명을 앞당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엄청난 연기 속에 불타버린 성경책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고, 물로 인한 손상까지 더해진 행정 본부의 갑작스럽고 총체적인 파괴는 우리의 자그마한 시설을 엉망진창으로 남겨두었다.
다음 날 경찰 수사관이 인 잔류물을 발견했는데, 이는 군사 수준의 폭발성을 의미합니다. 강력한 누군가가 우리 지역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내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작은 우리 예배 공동체가 거대한 종교 권력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즉각적인 지역 및 국제 지원의 폭주로 우리에겐 더 나은 곳으로 이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결국, 이곳은 그들의 집일 뿐 아니라 우리 집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조상들의 땅에서 예슈아를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인 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현상이다. 우리가 보기에, 우리의 모임 장소가 폭격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세워야 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몇 년 내에, 하나에서 시작한 우리 공동체는 북부 갈릴리 지역에 네 개의 공동체를 더 출산했다. 결국 우리는 모든 성공한 유대인들이 꿈꾸던 것, 즉 일생을 통해 일군 것을 유능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을 해냈다. 자비의 장막은 이제 내 딸 한나 테클레와 사위인 아비샬롬 목사 부부가 인도하고 있다. 자비의 장막은 지역 주민들과 폭넓은 관계를 맺으면서 활짝 꽃을 피웠다.
카찌르 캠프 출신의 청소년들 한가운데 앉은 에이탄
청소년들은?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우리 공동체의 십대들이 나른하고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스라엘에서 메시아닉 청소년으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청소년 시기 자체만 해도 어려운데 거기에 예슈아에 대한 유대적 신앙을 추가하면 "정상적인" 이스라엘 문화를 훨씬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로서, 나는 그에 대해 가만 있어선 안 된다고 느꼈다. 우리 운동의 미래가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인 90년대 중반, 소울드 아웃Souled Out이라는 미국의 한 사역 단체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닉 청년들을 위한 행사를 열기 시작했다. 시카고에서 온 이 아이들은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전도했다. 우리 청소년들이 마음 깊이 반응하는 모습에서 감명을 받은 나는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고자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인생을 변화시키는 예배의 환경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기 위해선 히브리어로 바뀌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이스라엘 문화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5년 동안 나는 소울드 아웃 팀의 리더인 캐시와 에드 배슬러가 1년에 몇 차례씩 계속해서 이스라엘로 팀들을 데려오는 것을 돕고자 자원했다.
소울드 아웃의 담대하고 기름 부으심 넘치는 사역을 통해 우리는 카찌르를 탄생시켰다. 카찌르는 히브리어로 "추수"를 의미한다. 우리는 2000년 겨울, 하누카 시즌에 최초의 카찌르 컨퍼런스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카찌르의 이사회에는 아리를 포함한 여러 예배 공동체 리더들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흐름으로부터 훌륭한 감독 및 지원을 제공 받았다.
지난 20년간의 청소년 캠프에서, 수천 명의 이스라엘 청소년들이 상담사와 강사들의 도움을 받았고, 예슈아를 따르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기쁨을 누렸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수년간 카찌르를 지원해 왔다. 우리가 실제 컨퍼런스 비용의 3분의 1만 아이들이 부담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모든 경제적 상황의 가정에서 어린 자녀들을 보낼 수 있게 한다. 나머지 비용을 기부한 여러 개인과 단체들 가운데, 마오즈는 가장 강력한 후원자로 두각을 드러낸다. 나는 마오즈가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해 준 것에 대해 충만한 감사를 드리지 않고는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없다.
캠프 기간 동안 예배 찬양을 연습하는 청소년들
이스라엘에서는 많은 일들이 성취되기 까지 수 년의 기도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그 덕에 승리가 더욱 달콤하게 느껴진다. 부동산 매입도 그런 것들 중 하나다. 일의 수단에 맞춘 시설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주인이 임대료를 올리고 싶어할지 아니면 변덕스럽게 팔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쫓겨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예배를 드리고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적인 장기 제자훈련에 사용될, 골란 고원에 구입한 새로운 시설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 지름길은 없지만, 이정표는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한 하나의 이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