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일: 2021년 4월 1일 |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

우리가 아들의 심각한 학습 장애 때문에 도움을 얻으려고 미국으로 떠났을 때, 텔아비브 외곽에 위치한 이스라엘 성도가 100명이 넘은 우리 공동체는 튼튼하고 생기 넘쳤다. 예배당부터 어린이 샤밭 학교 교실, 그리고 행정실까지, 우리가 지은 마오즈 센터에서는 한 뼘의 공간도 낭비되지 않고 있었다.

2년 후, 우리가 돌아왔을 때, 그곳은 텅빈 상태였다. 토라 두루마리를 보관하는 궤는 텅 비어 있었고, 백 개의 의자는 예배를 드리던 지하의 구석에 쌓여 있었다. 그것만이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리 가족이 지낼 수 있도록 살림을 윗층으로 옮겨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 뿐이었다.

우리는 1990년 여름에 돌아왔는데, 아들 아얄과 딸 샤니가 가을에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9월이 되기도 전에 세 가지 중대한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그 덕에 다음 해는 영적으로 우리가 이스라엘에서 겪은 통쾌하고 감정적인 시간이 되었다.

1980년대 활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마오즈 센터. 아리와 쉬라의 게스트룸은 사무실이 되었고 소르코람 가족은 다른 마을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걸프전

이스라엘로 돌아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사담 후쎄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미국의 주도로 35개국 연합군이 사담에 맞섰고 1월 중순에 이르러 쿠웨이트는 다시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승리가 선포되었을 때, 이스라엘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담은 “모든 전쟁의 어머니” 등등으로 이스라엘을 가스로 전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수없이 위협했다. 이스라엘은 주민들에게 방독면을 배포했고, 가정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모두가 공격 시에 대처할 수 있도록 개인 훈련을 가졌다. 우리는 아이들이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타이머를 가지고 연습을 했다. 실제로 공격을 받았을 때엔 아얄과 샤니가 놀다가도 불과 2분 만에 완전 무장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1월 18일 오전 2시 15분, 최초의 스커드 미사일이 텔아비브에 떨어졌다. 우린 비명 같은 사이렌 소리에 깼다. 미리 연습했던 대로 아리는 이웃에 사는 노부부를 맞아들이기 위해 정문으로 직진했고 나는 아얄을 깨우러 갔다. 깨어있을 때는 토네이도처럼 활동적인 아얄은 돌덩이처럼 자고 있었다.

“아얄! 일어나!” 내가 간청을 하고 몸을 흔들어 대도 아얄은 꼼짝도 안 하다가 첫 번째 폭발이 있고서야 깼다. 즉각 아얄은 놀란 채로 침대에서 나와 샤니 방으로 달려갔다. 거기가 우리가 정한 “안전한 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후딱 방독면과 방호복을 입었다. 이후 오랫동안 우리는 그 방에 하나 있는 창을 봉했고, 그래서 아리는 문을 닫고 모서리에 테이프를 붙였다. 이후 강아지를 포함한 우리 여섯은 방에 앉아서 공격을 당하면 라디오와 TV를 통해 전달될 거라고 했던 지시를 기다렸다.


여러 차례의 공격 중 한번은 샤니가 잠들었다. 샤니가 키우던 강아지는 정부가 제안한 대로 젖은 천과 베이킹소다를 가지고 임시로 만든 “방독면”을 쓰고 쉴 수 있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시간이 최소 30분 흐르고서 TV와 라디오 방송국이 행동을 결집시켜 정규 방송으로 전환했다. 결국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육군 대변인 낰흐만 샤이의 확신을 주는 음성이 전파를 탔고, 이스라엘은 방금 폭격을 당했지만 모든 것이 통제 하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날 밤 대변인의 지시 사이에, 방송국에서는 조국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민요들을 틀어줬다. 4시간 후, 방 안의 산소량이 너무 줄었을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던 즈음, 낰흐만 샤이는 방안에서 나가도 좋다고 방송했다. 물론 추후 통보 시까지 휴교령도 내려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최초의 미사일 공격 중에 텔아비브 지역에서만 668개의 건물과 1,000개의 아파트들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었다. 수천 개 이상이 이후 며칠 동안 폭파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영 TV에서는 구체적 사항이 전달되지 않아, 사담이 다음 미사일을 어디로 쏴야할 지 “피드백”을 받을 수가 없었다.

스커드 미사일은 거의 항상 밤에 쏘아올려졌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어딜 가든 방독면을 지니고 다녔다. 사이렌이 언제 울릴지 모른다는 점과 일부 지역에서는 사이렌이 거의 들리질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모두가 오토바이를 부릉거리며 지나가거나 냉장고에서 이상한 소리만 나도 펄쩍 뛰게 되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스라엘은 한 침묵의 라디오 방송국을 지정하여 사이렌 소리와 공격 중의 위험 경보만 전하게 했다. 감정의 손실이 있었음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로운 상황에 잘 적응했고 어린이들은 각자 방독면 상자를 꾸미느라 정신없었다.


방독면은 끈이 달린 상자에 배포되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했다.

아얄과 샤니는 일상복을 입고 잠이 들기 시작했다. 잠옷은 방독 장구를 갖추기에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국의 다른 아이들처럼, 우리 아이들도 방독면을 쓴 채 자는 법을 배웠다. 대피실로 달려가는 일, 방독면을 쓰는 일, 미사일 폭발, 뒤이어 국민들을 진정시키려는 낰흐만 샤이 육군 대변인의 발표는 이스라엘에 밤마다 이어지는 순서가 되었다. 엄청난 신뢰를 보이며 이스라엘 국민들은 샤이 대변인의 지시를 철저히 따랐다.

총 13명이 심장 마비 등으로 공격 중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실제론 단 1명이 미사일 발포로 인해 사망했다. 이 시간 동안 이스라엘이 당한 막대한 피해를 생각할 때 기적일 수 밖에 없는 역사다. 전쟁 말미에는 한 미사일이 마오즈 센터 바로 위를 날아가서 불과 3km 밖의 지중해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겨우 6주 동안 있었지만, 이 일로 문화 자체가 바뀌었다. 당시 아무도 일상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뭐라고 해도 아얄과 샤니는 다시 잠옷을 입고 잠자리에 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 당시의 가장 독특한 부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열렸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우리가 여호와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어딜 가나 예슈아에 대해 나눌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갑자기 하나님이나 사후 세계에 대해 믿고 있던 바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최고 우선 순위가 되었다. 이 순간의 의의는 동일하게 열리는 체험을 하고 있던 전국의 믿는 자들에게 주변 사람을 통해 분명히 나타났다.

사이렌이 울렸을 때 방문 중이던 친구들과 함께 들어간 “대피소"에서

갑작스럽고 막대한 규모의 이민의 물결

1990년, (불과 1세대 된) 이스라엘 인구는 겨우 4백만이었다! 기간 시설 대부분은 겨우 개발 중이었고, 생활은 작은 마을 수준이었다. 모두가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붕괴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소비에트가 러시아 유대인들을 대한 방식에 국제적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투옥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목은 히브리어 학습, 유대 전통 실행, 이스라엘 이민 비자 신청 등이었다. 이러한 행동은 어떠한 종교적 신념도 허용하지 않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도전이었다. 너무나 흥미롭게도, 소비에트는 유대인들의 위대한 지성, 기술, 그리고 업적들엔 큰 가치를 두었는데, 자신들의 기득권으로 유대인들이 출생 국가를 버리지 못하게 금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소련과 철의 장막이 무너지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꿈꿔온 수십만의 러시아 유대인들이 풀려나게 되었다. 마치 댐이 무너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 낙수 현상은 1988년에 시작되었고, 1989년까지 흐름이 이어졌다. 그러나 주민이 4백만도 안 되던 나라에 90만의 유대인 식구들이 추가된 홍수의 시작은 1990년이었다.


구소련의 화폐가 외국에서는 쓸모없게 된 가운데,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은 어떤 재산도 가져나올 수 없었다. 자금을 조금이라도 가져나오려던 그들은 이스라엘에 들어오기 전 인기 있는 물품들을 사서 베두윈 시장에서 거래를 했다.

흡수

러시아 유대인들의 문화는 특이점들이 있었다. 유대적 뿌리가 있었지만 그들은 베이컨, 보드카 그리고 “노뷔 곧(신년에 열리는 변종 크리스마스 행사)”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인들은 안식일을 맞을 때 마시는 전통적 포도주 몇 잔 외엔 술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코셔 고기 외엔 이스라엘 내에서 볼 수 없었고, 크리스마스 트리는 수도원에 사는 수도사, 성직자들만 챙겼다. 갑자기 이스라엘 국민 1/5이 러시아 출신이 되자, 문화가 하룻밤 새에 바뀐 느낌이었다.

정치인들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투자할 것을 독려하는 방송을 했다. “우리는 고숙련 공학자, 예술가, 의사와 과학자들을 데려올 것입니다. 몇 년만 있으면 이로 인해 우리 경제와 문화는 놀라운 진작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선언했다.

그러나 고학력의 의사, 공학자, 탁월한 음악인들은 청소부, 계산원 혹은 쓰레기 수거인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 거리에는 경력 많은 노숙인들이 넘쳐났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도시 길거리마다 (동전 한 닢을 바라는) 최고 수준의 뮤지션들의 연주가 있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이 세대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쓸모가 있기엔 언어의 장벽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당시 사치스러운 삶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상당한 인구가 작은 마을 혹은 키부츠라는 집단 공동체에서 살았다. (초기 이스라엘인들이 공동체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자발적 공산주의”라고 보면 된다.) “기꺼이 가진 모든 걸 다 내놓고 필요한 걸 받는 방식”은 모두가 생존 모드에 있을 때는 통한다. 그러나 비천한 존재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집이라고 할만한 괜찮은 장소를 구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주민들은 심드렁하지 않았다. 2만 명의 새로운 학생들을 위한 신학년도 계획을 두고, 창조적 집단 사고가 많이 이뤄졌다. 수천 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신규 이민 가정들에게 임대를 하고자 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안들이 고려되었다. 주거용, 상업용 건물들의 옥상마다 텐트 및 캐러밴을 설치하는 것도 있었는데, 그러면 수도, 전기, 가스 등의 접근이 쉬웠기 때문이다. 정말 집단적인 노력이 진심으로 있었고, 땅을 가진 정부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의 부동산에 캐러밴을 갖다 놓아 이민 가정들이 지낼 수 있도록 명령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충분치 않았다. 주택만이 문제가 아니라 일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20명을 방 3개짜리 집에 어떻게든 쑤셔넣는 것과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사람들은 소련에서의 삶이 얼마나 안 좋았길래 이런 환경을 대안이라고 찾아왔을까 의문을 가졌다. 시작은 평탄치 않았지만,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고숙련 이민자들은 90년대 말 이후 이스라엘의 의료와 기술계 붐을 일으키는 데에 특별한 기여를 했다.

어쩌면 러시아계 이민의 가장 매혹적인 부분은 이라크에서 이스라엘로 미사일이 떨어지고 있을 때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모든 시간의 경험들은 예레미야와 이사야 말씀이 생생히 느껴지게 해줬다.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주민이 많아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 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 하리니 (사 49:19~20)

수많은 유대인 이민자들이 아직 구소련을 떠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성령의 부으심으로 믿음에 이르게 됐다. 조나단 버니스 랍비 같은 사람들은 대규모의 메시아닉 콘서트에 간단한 복음의 메시지를 곁들여 수천 명의 러시아계 유대인들을 믿음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 대부분이 메시아 예슈아를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도록 세뇌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슈아의 메시지를 접한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에 도착하자마자 믿음을 갖게 됐다.

현재는 전국 도시마다 러시아계 메시아닉 유대인 공동체가 많이 있다. 우리는 이곳 목회자들 일부와 동행하는 기쁨 가운데, 히브리어 학교에 등록을 시켜 이들이 공동체에서 히브리어로 훈련된 아이들과도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세대가 리더십을 이어 받으면서, 이 공동체들은 러시아어 공동체에서 히브리어로 예배하는 공동체로 “진화”하고 있다.


전쟁 때문에 몇 달 늦춰지긴 했지만, 아얄과 샤니는 1991년 초여름에 바르와 바트 미쯔바를 할 수 있었다. 그 기념식에 진행됐던 일들 가운데 아얄의 학습 문제를 알았던 모든 사람에게 가장 신났던 부분은 아이가 파라샤를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훈련 센터

이스라엘에 돌아와 사역을 사실상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우리는 전국적인 관점에서 성도들의 몸된 공동체를 다시 보게 됐다. 선구자로서 우리는 굳이 “우리가 잘 하는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지금 이 단계에서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됐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예슈아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들은 그분에 대해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거짓된 이야기들만 들어왔다. 그들은 예슈아에 대해 바로 들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확실히 알았다. 새 신자들을 돌봐주고 제자 삼을 지도자의 수가 너무 적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막대한 숫자의 이스라엘인들이 주님을 만났다가 떨어져나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리더들을 훈련시킨다는 비전이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고든 린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동적에게 직접 나아가도록 훈련시킬 꿈을 가지고 올리브산에 건물을 매입하였다. 한 아랍 가족이 그 건물을 훔쳐갔을 때, 어머니(프레다 린지)는 모금을 하여 이스라엘로 가서, 또 다른 건물을 샀다. 이스라엘의 리더들을 훈련한다는 비전은 어머니께도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다.

1991년 말에 이르러, 실패한 공동체의 남은 흔적들이 아직도 주변에 있는 가운데, 배리와 바트야 세갈 부부를 비롯해 우리가 신뢰하는 여러 친구들이 예루살렘으로 이사를 하라고 권면했다. “너희 가족은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계속 이사를 하는데, 계속 있을 곳을 찾아서 정착하는 게 좋겠어. 예루살렘엔 믿는 사람들도 많아. 제자훈련 학교를 시작해서, 해외 방문객들이 오면 너희와 연락하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고 계신 일을 보기도 쉬워질 거야.” 그들은 말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이스라엘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기에, 10대에 들어선 우리 아이들은 다시 모국어와 상당히 불경건한 문화(2년 동안 믿는 이들 가운데 둘러싸여 살다 왔기에)에 적응해야 했다. 이 나라에 돌아온 지 불과 1년 여 밖에 안 됐는데, 또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아얄은 어려워했지만, 샤니는 특별 국가 스포츠 프로그램에 뽑힌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진행되면서 6개월 동안 울어댔다.

선구적인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 화려해보일 때가 있지만, 실제로는 경로 설정을 해서 더 이상 길이 없을 때까지 나아갔다가 다시 조금 돌아와 재설정을 해야 하는 일이 많다. 목표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지만, 매번 가다 보면 막다른 길이 나온다. 그 과정에서 많은 교훈을 얻기에, 아무리 막다른 길이라고 해도 그 경험 자체로 겪고 힘들어 할만한 가치가 있다.

예루살렘의 훈련 센터를 추진하는 것이 바로 그런 길이었다. 우리는 개인 돈 5천 달러를 가지고 메바세렡 찌욘(예루살렘에서 10분 떨어진 변두리 마을)에 우리 집을 계약했다. 그 집은 건축 중이었지만, 다른 친구들과 함께 주님의 집의 기초를 놓는 일에 헌신했다.

라마트 하샤론의 마오즈 센터를 마침내 팔게 되고 나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작은 호텔 하나를 계약하여 그곳을 훈련 센터로 바꿔놓기로 계획했다. 우리는 매일 밤낮 가르칠 수 있는 에너지와 열정이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이야기 중에 가장 의미심장한 한 기간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이었다. 우리는 리더들을 일으키고, 후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을 따라 일할 수 있게 풀리는 것이었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지만 자신들만의 계획을 가진 예루살렘 사람들이 있었다.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를 매월 살펴보고 있던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은 우리의 계획을 미리 알아차리고 “소르코람 가족을 막으라"는 소규모 집회를 벌였다. 지역 신문에 기고된 기사들을 보면, 그들은 연줄을 이용해 예루살렘 시청 직원들을 비롯하여 여러 지자체 직원들에게 소르코람이나 마오즈라는 이름이 들어가면 절대로 매입이나 허가를 승인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한번은 크네세트 의원들이 우리의 움직임에 대해서 공개 토론을 벌였고, 그게 TV로 방송되기도 했다.

우리가 새로 구매한 집의 위치를 알아차렸을 때, 초정통파는 이웃집들을 모두 방문하여 “선교사 부부"가 이 동네에 이사 오도록 놔뒀다가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경고를 했다. 우리를 보거나, 우리의 목소리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를 끔찍히 여기며 새로 산 우리 집을 폭파시키겠다고 위협해오게 됐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계약금을 기꺼이 전액 돌려주겠다며 계약을 없던 일로 하자고 간청해왔다. 반대가 있다는 게 재밌진 않았지만, 겁이 나지도 않았다. 우리 집을 폭파시키겠다는 위협을 받은 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린 밀어부쳐야 함을 알았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라마트 하샤론의 마오즈 센터 매매 건이 중단되었다. 몇 밤이 지나고, 나는 주님께서 생생한 꿈으로 이사해선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체험을 했다. 깨어났을 때, 아리는 부동산에서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내 꿈 얘기를 방금 들은 아리는 그 집을 더 이상 팔지 않을 거라고 전했다.

한편 우리의 좋은 친구 배리와 바트야 세갈 부부는 예루살렘의 바로 우리 옆집을 구매한 상태였다가, 그 집에 심각한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우리는 계약을 취소했고, 중개업자는 우리가 주님께 드렸던 그 집을 세갈 부부에게 넘겼다.

우리는 기도하며 믿음으로 나아갔다. 결국 분명해진 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텔아비브 지역에 머물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때까지 모금한 액수는 마오즈가 리더십 훈련 학교를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만큼엔 전혀 못 미쳤기에, 우리는 주님께 다른 방식으로 당신의 왕국을 확장해주시기를 구했다. 물론 목표는 건물이 될 수 없었다. 건물은 그저 도구에 불과했다. 목표는 주님 안에서 젊은 신자들을 목회하고 훈련할 수 있는 성숙한 리더들이었다. 이제 잠시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전진할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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