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레시트의 소년들
몇 년 전, 코비와 제가 데이비드 사파파 목사님의 비전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이스라엘계 에티오피아인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실 건가요,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실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지금은 교회 구성원 대부분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젊은 에티오피아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비전을 종이에 적을 때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위한" 교회를 개척하고 싶다고 썼습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코비와 나는 대답했다.
지난 새해, 예루살렘의 베레시트(창세기) 회중은 코비와 제가 거의 창립 초기부터 리더십을 맡아온 곳으로, "공식" 모임 장소로 이전한 지 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겠다는 비전을 품고 시작한 데이비드 사파파는 자신의 리더 팀을 소개했습니다.
"이분들이 제 지도자들입니다." 데이비드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모두 한때 군이나 형사 교도소 같은 곳에 수감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온 힘을 다해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베레시트 회중 신도들의 간증에 비하면 그들의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모두 웃었다.
"그들이 신앙을 갖게 된 지 몇 년밖에 안 됐다는 건 알지만, 우리는 그들의 간증을 나눠야 해요." 코비가 몸을 기울여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멸망의 길에서 건져내고 계신다는 걸 알아야 해요.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려줄 순 없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곤경에 처할 거예요!" 우리는 둘 다 웃으며 동의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시다는 걸 보여줄 만큼은 할 수 있어요!"

데수
에티오피아에서 약속의 땅에 막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저는 네 살이었습니다. 오빠, 어머니, 그리고 제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제외하고는 그날의 기억조차 없습니다. 막내 여동생은 여동생의 등에 업혀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진을 아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그 사진이 에티오피아 알리야(이민)를 상징하는 상징적인 사진(오른쪽 사진)이 되어 정부 청사에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흡수 센터"에 배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북부의 캐러밴 지역으로, 모두 에티오피아 이민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히브리어와 이스라엘이라는 "신세계"를 배우는 데 집중했습니다.
2년 후, 우리는 해안에 있는 또 다른 북부 도시의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은 아이들이 보호자 없이 어슬렁거리는 거친 서부였습니다. 두 살배기 여동생 에무 나를 돌보고, 다른 아이들과 놀게 공원에 맡겨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거리와 놀이터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부터 십 대 아이들까지 온갖 아이들로 가득했고, 그들을 지켜줄 어른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지금은 다 자라 열정적인 예배 인도자가 된 그녀는 전국에서 불려지고 여러 언어로 번역된 유명한 노래 " 카마 헤세드 "의 작사가입니다.)
아홉 살쯤 되었을 때, 학교에서 동네를 걷다가 누군가 저를 "고이(이방인)"라고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기에 감정적으로 상처받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유대인인데 왜 저를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집에 와서 물어보니 어머니가 예슈아(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그분을 믿게 되었다고 모두에게 이야기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저는 큰형 데이비드처럼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에티오피아의 위대한 랍비 라코우 임하렌의 손자였습니다! 우리는 이교도적이고 우상숭배적인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앙을 거부한 것이 제가 신을 찾도록 이끌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종교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기숙학교
14살 무렵, 저는 규칙적으로 대마초를 피웠고, 8학년 말에는 아무 이유 없이 교장 선생님의 뺨을 때렸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위한 기숙학교로 보내졌습니다. 사실 제게 일어난 가장 좋은 일 중 하나였습니다. 약물 사용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제가 학업에 진지하게 임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10학년을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짐을 싸던 중,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떠나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버스를 타렴. 우리 이사했단다." 그래서 저는 딱 맞는 버스를 찾아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또 다른 동네에 있는 새 집에 도착했습니다.
여름은 지루했지만, 친구들을 사귀었고, 당연히 그 덕분에 우리는 많은 문제에 휘말렸다. 어떤 건 그냥 애들 장난이었고, 어떤 건 범죄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항상 무사히 넘어갔다. 다행히도, 친구들은 내가 없을 때만 스턴트에 걸려 곤란한 상황에 처했고, 아마 그게 내가 지금 전과가 없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1년을 더 공부해서 모든 학업을 마쳤고, 그 후 골라니 전투 부대에 징집되었습니다.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캐스트 리드 작전에 참여했고, 많은 테러리스트들이 그 전투에서 생을 마감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비롯한 다른 문제 없이 전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허리 디스크가 재발했고, 그 후유증은 수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제 군 복무는 3년이었고, 처음 2년 반 동안은 온 힘을 다했습니다. 마지막 6개월 동안 부대원 모두가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습니다. 제대로 된 전투는 없었지만, 마치 전투가 코앞에 다가온 것처럼 맹렬히 훈련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문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군 교도소에 수감되거나 심지어 전과 기록을 남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 이후로 군은 전투 부대의 임무 수행 방식을 바꿔왔습니다. 조국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싸운 십 대들이 전과 기록을 남기고 복무를 마치는 것은 국가에 큰 해가 됩니다.
2년 넘게 한 달에 한 번밖에 집에 갈 수 없었고, 수입도 너무 적어서 (700셰켈, 한 달에 약 200달러) 기본적인 생활비조차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단이탈을 했습니다. 3주 후 자수했고, 군 교도소에서 14일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무단이탈이 최선의 결정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일들이 제게 도움이 되어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고, 마지막 6개월은 기지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주방이 전투 부대보다 딱히 더 안전하다고 할 순 없었습니다. 등에 누가 찔렀을 때 생긴 흉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죠.
군 복무를 마치고 저는 많은 전투병들이 제대 후 하는 일, 즉 보안 업무를 맡았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회사는 위험한 아랍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을 위한 비밀 경호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저희의 임무는 유대인들이 외출하고 싶을 때 집에서 안전한 지역 외곽으로 안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일하다가 토목 공학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사촌이 소방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생각은 저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신체 훈련은 힘들고 도전적이면서도 정말 즐거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방관들이 온갖 미지의 상황에 뛰어들 때 얼마나 심도 있는 지식을 갖추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는 연령대별로 다른 치료법을 배우고, 다양한 지형의 특성과 화학 물질이 다른 화학 물질과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소방관 시절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모험심이 많았습니다. 불을 끄고 퇴근 후 파티를 즐기는 와중에도 바빴죠. 클럽에서 만난 여자애와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1년 동안 결혼 생활을 이어갔지만, 우리 관계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십 대 초반부터 대마초는 제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항상 제 곁에 있어 주었기에 그 약에 "내 절친"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8년 동안 소방관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재산 피해를 목격했지만, 가장 힘든 기억은 목숨을 잃었을 때였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모든 죽음과 파괴를 목격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제 삶 전반에 걸쳐 저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가 모든 것을 맛보고,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했는데도 여전히 공허하구나." 생각의 안개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실존하시는가요? 성경 이야기처럼요? 당신이 실존하시는지, 그리고 알고 싶으시다면, 당신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연히 메노 칼리셰르가 쓴 '타나크(구약성서)의 예슈아'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 책은 우리 유대인들에게 예슈아가 어떤 분이셨는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행동은 한동안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양심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양심은 어두웠고, 어떤 일이든 죄책감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클럽에 갔어요. 평소처럼 취해 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제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 같았죠. 취했던 기분은 사라지고, 마치 모두가 헤드폰을 끼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파티에 있는 것 같았어요. 마치 조용히 서서 구경만 하는 것 같았죠. 주변과 완전히 단절된 기분이었어요.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갔죠.
전 남자친구에게 돌아가 재혼했습니다. 곧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지만, 제가 어둠에서 빛으로 바뀐 날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약은 계속했지만, 파티에 가는 것을 그만두고 생각이 더욱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제게 일어난 이 모든 변화를 싫어했습니다.
엄마는 제가 아이들을 집에 초대해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건 괜찮다고 하셨지만, 제가 방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걸 보면 집안의 악령들이 미쳐 날뛰는 것 같아서 엄마가 저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셨어요. 제가 영적으로 강해진다고 느낄수록 집안 상황은 더 악화되었어요. 엄마는 제가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하는 꿈을 꾸셨지만, 저는 듣지 않았어요.
마침내 어느 날 밤, 아내가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예슈(예수를 가리키는 유대인의 속어)와 가족 중 하나를 택하라." 저는 아내에게 예슈아를 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내의 부모님이 찾아와 저에게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었습니다. 딸들은 울고 저는 휴대폰과 잠옷을 입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끔찍한 광경이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제 인생에서 엄청나게 힘든 시기였지만, 영적으로는 큰 성장의 시기였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어머니 소파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손상되었던 디스크(이미 한 번 수술로 치료받았던)가 다시 파열되었습니다. 갑자기 제 마지막 안정의 보루였던 직장이 박탈당했습니다. 한 달 만에 소중히 간직했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구조하다
부상 때문에 몇 달간 유급 휴가를 받았지만, 그동안 거의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밤마다 울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가족을 잃었고, 병가가 끝나면 양육비를 어떻게 낼지 몰라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학위를 준비하고 있던 여동생에게 이야기했더니, 제가 어떤 분야에 잘 맞을지 알아보려면 진로 탐색 시험을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토목공학"이라는 결과가 나왔을 때 저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토목공학은 제가 이미 오래전부터 공부를 시작했던 분야였으니까요. 사실, 학위를 받기 위해 이미 3개월 동안 공부를 해 온 상태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방향은 어느 정도 잡았지만, 곧 치러질 양육비를 위한 당장의 자금은 없었습니다. 제때 내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채무 추심 시스템이라는 깊고 복잡한 함정에 빠져 결국 채무자 감옥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양육비 지급 기한이 3주 남았을 때, 학생들의 학업 기간 동안 재정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는 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제 이야기를 조금만 했고, 그녀는 곧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급 기한까지 일주일 남았을 때, 그녀는 제 학업 기간 동안 양육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가입했던 상해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갑자기 아이들을 돌볼 뿐만 아니라 공부에 집중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느꼈던 기쁨과 감사는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제 인생이 완전히 파탄 나려고 했던 상황에서 완전히 구원받은 셈이었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은 분명 하나님이셨습니다.

새로운 삶
어린 시절 어머니가 주님께로 돌아오셨을 때, 누나 사피어도 거의 즉시 어머니를 따랐습니다. 큰형 데이비드는 그 경험 전까지는 그 생각에 매우 적대적이었지만, 14살이 되자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그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제가 이교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유대교적 뿌리를 버린" 가족에게 너무 화가 나서 주님께 굴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제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도 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형 데이비드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데이비드는 오랫동안 변호사로 일해 왔기 때문에 서로의 삶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데이비드가 세 가지 주요 목표를 가진 에티오피아 교회를 시작하겠다는 자신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 주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 주님을 알았던 자들과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 다가가기
- 반역하는 신자들의 자녀들, 특히 지도자들의 자녀들을 만나다
그는 위에 언급된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단계의 어느 단계에 있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이 회중을 세울 것입니다. 아, 그리고 물론, 가장 특별한 것은, 이 회중이 에티오피아 최초의 히브리어 사용 에티오피아 회중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에티오피아 교회들이 모두 암하라어를 사용해서 좋은 교회를 선택할 수 없었던 젊은 에티오피아인들을 위한 교회를 만든다는 것은 저에게는 엄청난 비전이었습니다. 물론 데이비드는 이미 "잃어버린 자들에게 다가가는" 일에 대해 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트에서 우연히 스테파노스라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1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친구였죠. 제가 파티를 열던 시절에는 절친이었지만, 1년 전에 마약 문제로 다투었었거든요. 우연한 만남이었고, 그 만남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예슈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사과부터 해야 할까요? 예슈아는 유대인과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민감한 주제인데, 이스라엘 사람과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그와 그렇게 삶을 바꿀 만한 메시지를 전할 만큼 친분이 있었던 걸까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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