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레쉬트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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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23년 9월 1일 |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

위 이미지: 신년 축하 행사에 참석한 데수, 스테파노스, 아사프, 다비드 목사와 티기스트 사모.


몇 년 전 다비드 사파파 목사님과 비전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코비와 저는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에티오피아인들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 생각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인들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십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지금 그 공동체원 대부분이 히브리어를 쓰는 젊은 에티오피아인들이지만, 처음에 그 비전을 종이에 적었을 때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위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럼, 함께 하죠!" 코비와 저는 대답했습니다.

거의 태동부터 리더십으로 관여해 온 코비와 저는 예루살렘에서 지난 새해, 베레쉬트(창세기) 공동체에서 "공식적인" 모임 장소로 옮긴 지 2년째를 맞았습니다. 젊은 에티오피아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비전으로 모든 것을 시작한 다비드 사파파가 그의 리더십 팀을 소개했습니다.

"이 분들이 저희 리더들입니다." 라고 다비드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모두 한 시점에 일종의 군사 또는 형사 감옥에 있었지만, 지금은 가진 모든 것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저희 모두는 베레쉬트 공동체원들의 간증에 관한 한 그 이야기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웃었습니다.

"그들이 믿은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간증들 일부를 공유해야 해." 코비가 몸을 굽혀 제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멸망의 길에서 끌어내고 계심을 사람들이 알아야 해요. 마치 하나님께서 예고도 없이 그냥 하시는 거죠."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들 이야기를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잖아… 그들이 곤경에 빠지면 어떡해!" 저희는 웃으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줄 정도는 말할 수 있어!"

데수

에티오피아에서 출발하여 약속의 땅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저는 4살이었습니다. 남동생,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 외에는 그 날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막내 여동생은 어부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아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에티오피아 출신의 알리야를 상징하는, 정부 건물에 걸려있는 상징적인 사진(오른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오로지 에티오피아 이민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북부 대상(隊商)들이 사는 동네의 "흡수 센터"에 배치되었습니다. 히브리어와 이스라엘이라는 "신세계"를 배우는 데 집중하는 곳이었습니다.

2년 후 우리는 해안의 다른 북부 도시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은 아이들이 감독 없이 돌아다니는 황야와도 같았어요. 저는 두 살배기 여동생 에무나를 돌보는 일을 맡아서 다른 아이들과 놀기 위해 공원에 맡겼던 기억이 납니다. 거리와 놀이터에는 유아부터 청소년까지 모든 아이들이 가득했지만 그들을 지켜볼 어른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습니다. 에무나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현재 에무나는 성인이 되어 열정적인 예배 인도자가 되었으며, 전국에서 불리고 여러 언어로 번역된 유명한 노래 "카마 헤세드"의 작사가이기도 합니다).

아홉 살쯤 되었을 때,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오는데 누군가가 저를 "고이"(이방인)이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 감정을 상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유대인인데, 왜 그들은 이방인이라고 불렀을까?' 집에 와서 그에 대해 물었고, 어머니가 모든 사람에게 예슈아의 환상을 보아 믿게 되었다고 말하고 다녔음을 알았습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저는 큰 형 다비드와 마찬가지로 수치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에티오피아의 위대한 라코우 임하렌 랍비의 손자들이었죠. 이교적 우상숭배를 하는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머니의 믿음을 거부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구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종교에서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죠.

기숙 학교

14살이 되었을 때, 저는 정기적으로 대마초를 피웠고 8학년 말 무렵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교장 선생님의 뺨을 때려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다음 해에 저는 요주의 아이들을 위한 기숙 학교로 보내졌습니다. 사실 그건 제게 일어난 가장 좋은 일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비록 마약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곳의 체계는 공부에 대해 제가 진지해지게 도와주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10학년을 마치고 짐을 꾸리고 있을 때, 어머니로부터 "끝나면 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와라. 우리 이사했어."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적절한 버스를 찾아 에티오피아 출신들이 지배적인 또 다른 동네의 새 집에 도착했습니다.

여름은 지루했지만, 저는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많은 문제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중 일부는 단순한 철부지들의 어리석음이었고, 일부는 범죄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저는 항상 거기서 벗어나는 듯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 친구들은 제가 없을 때 이상한 짓과 복잡한 문제들에 얽혔고, 아마 그것이 제가 오늘날 범죄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유일한 이유일 것입니다.

훈련 수료 기념식

저는 고등학교에서 1년을 더 보낸 끝에 모든 과정을 마칠 수 있었고 그 후 골라니 전투 부대에 입대했습니다. 저희는 가자의 "던져진 납" 작전에 투입되었고 많은 테러리스트들이 그 전투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동료 군인들 중 일부가 겪은 기타 문제들 없이 그럭저럭 마쳤습니다. 그러나 디스크 하나가 꺾여 그 파장은 몇 년 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군복무는 3년 동안 지속되었고 처음 2년 반 동안 저는 올인 했습니다. 마지막 6개월은 저희 부대의 모든 사람들이 한계에 다다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희에겐 주어진 진짜 전투가 없었지만 여전히 전투가 임박한 것처럼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모두가 반항을 하기 시작했고, 많은 경우 영창에 갔으며 심지어 일부는 전과도 남았습니다. 이후로 10대들이 국가를 위해 진심으로 싸우도록 했다가 결국 전과만 안겨주는 것은 국가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전투 부대의 임무를 부여하는 방식을 바꿨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저는 한 달에 한 번 집에 갈 수 있었고 너무 적은 돈(700셰켈, 한 달에 약 200달러)을 벌어서 기본적인 것조차 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단이탈을 했습니다. 3주 후 자수했고, 군 교도소 14일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무단이탈이 최선의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덕에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게 해준 일련의 사건들에 도움이 되었고 마지막 반년은 부대 주방에서 일하며 보냈습니다.

돌이켜보면, 부엌이 전투 부대보다 딱히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한 남자가 칼로 찔러 생긴 상처가 등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겠습니다.

군복무를 마쳤을 때, 저는 많은 전투병들이 제대하자마자 하는 일을 했습니다. 보안 분야에 일자리를 구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아랍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을 위해 비밀리에 보호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였습니다. 저희 일은 단순히 그들이 외출하고 싶을 때 집에서 안전한 지역 가장자리까지 경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토목 공학 분야에서 직업을 갖기로 진심으로 결정하기 전까지 3년 동안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났을 때, 제 사촌이 소방관이 될 수 있는 기회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생각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소방관 시절의 데수

육체 훈련은 어려웠고 도전적이었지만, 아주 즐길만 했습니다. 미리 알 수 없는 온갖 상황에 놓일 때 소방관들이 가져야 할 심층적인 지식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여러 연령대에 대한 각각의 치료법을 배워야 했고, 다양한 지형의 특성을 알고 화학물질이 어떤 상호 반응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반응하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저의 소방관 시절은 모험천만 했습니다. 화재 진압과 퇴근 후 파티를 즐기는 생활 사이에 바쁘게 지냈습니다. 저는 클럽에서 한 여자를 만나서 관계를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아이를 가졌고 그 후 1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지만, 관계는 계속해서 혼돈 속을 지났습니다.

10대 초반부터 피웠기에 이제 대마초가 제겐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에 대마초를 "절친"이라고 불렀습니다. 8년 동안 저는 소방관으로 일했습니다. 많은 재산 파괴를 보았지만, 저에게 가진 가장 어려운 기억은 생명을 잃었을 때였습니다. 이 모든 죽음과 파괴를 목격하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제 평생 동안 어떻게 저를 구해주셨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마약에 취한 채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너는 모든 것을 맛보고, 원하는 모든 것을 했는데 공허하구나." 저는 하나님께 여쭙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짜 계세요?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계신다면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고 싶어요."

메노 칼리셔의 <타나크(구약성서)에 나타난 예슈아>라는 책을 읽은 후 예슈아가 우리 유대인에게 어떤 분인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제 행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제 양심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양심이 어두웠고 어떤 일이든 죄책감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친구들과 클럽에 갔습니다. 다른 때처럼 마약을 했지만 문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제 안에 있는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흥분 상태는 사라졌고 모든 사람이 헤드폰을 끼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저만 거기 서서 침묵 속에 파티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전체 상황과 너무 단절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냥 돌아서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 없이 집을 향해 걸어 갔습니다.

저는 이혼한 아내에게 돌아가 재혼을 했습니다. 곧 저희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바뀐 한 날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향해 표류했다고 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마약을 하고 있었지만 파티에 가는 일은 멈췄고, 제 생각은 주님을 향해 더 많이 갔습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제 모든 변화를 싫어했습니다.

아내는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데 가는 것은 괜찮았지만, 제가 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발견하면 저희 집의 악령들이 날뛴다며 저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영적으로 탄탄해지고 있다고 느낄수록, 집안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꿈을 꾸었다고 경고하셨지만, 저는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밤, 아내는 제게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예슈(유대인이 예수를 향해 저주하는 표현)와 가족 중 하나를 선택해." 저는 그녀에게 예슈아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장인 장모님은 제게 와서 욕을 하며 침을 뱉었습니다. 딸들이 우는 가운데 저는 핸드폰과 잠옷을 들고 집을 뛰쳐나가는, 끔찍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는 제 삶의 자연적인 측면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즌이었지만, 영적으로는 큰 성장을 한 시기였습니다. 저는 어머니 댁에 들어가 소파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전에 손상되었던 디스크(이미 한 번 수술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가 다시 파열되었습니다. 갑자기, 제 마지막 안정의 보루인 일자리마저 저에게서 사라졌습니다. 한 달 만에 저는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구출

부상 때문에 몇 달간 유급 휴가가 있었지만, 그 시간 내내 겨우 옴짝달싹만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울고 부르짖으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가족을 잃었고 병가가 다 소진되면 양육비를 어떻게 지불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학위 과정을 밟고 있던 여동생과 이야기를 해봤는데 제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진로 적성 검사를 하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결과가 "토목 공학"으로 나오자 저는 웃었습니다. 사실 이미 학위를 따기 위해 3개월간의 공부를 진행 중인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부하던 시절의 데수

미래에 대해 어느 정도 방향을 잡고 있었지만, 저는 앞으로 양육비를 줄 자금이 당장 없었습니다. 제때 그것을 지불하지 않으면 결국 저는 채무자로 감옥에 빠질 수 있는 것이 이스라엘의 채권 추심 시스템의 깊고 복잡한 구멍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위자료 지불 기한을 3주 앞두고 있던 시점에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에서 일했던 한 여성과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제 이야기의 일부만 해주었는데, 그녀는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게 1주일의 시간이 남아있을 때, 제 학업 기간 동안 단체에서 양육비를 부담하겠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상해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직후, 갑자기 저는 아이들이 밥을 먹고 지내는지 확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고 결국 저도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느꼈던 기쁨과 감사는 상상도 못하실 것입니다. 완전한 탈선 사고로 향하고 있던 제 삶이라는 기차가 완전히 구조되었고, 그 일을 이루신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었습니다.

데수는 베레쉬트에서 섬기는 동안 탈리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공동체에서 결혼했고, 이제 막 첫 아이를 맞았습니다.

새 삶

어린 시절 어머니가 주님께 나아오셨을 때, 여동생 사피르는 거의 즉시 어머니를 따라 믿게 되었습니다. 큰형 다비드는 14살에 체험을 하기까지 신앙에 매우 적대적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저도 전혀 믿음에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제가 이교적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인해 가족들이 "유대 민족의 뿌리를 버렸다"는 사실로 너무 화가 나서 저 자신이 주님께 순복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던 것 같습니다.

이제야 바야흐로 주님께 마음을 사로잡힌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저는 무언가 해야 했습니다. 주님께 의미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다비드 형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몇 년 동안 형은 변호사가 되고자 애를 써왔기 때문에 저희는 서로의 삶에 많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형은 세 가지 주요한 초점을 가지고 에티오피아계 공동체를 시작하려는 비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 주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아웃리치
  • 한 때 주님을 알았다가 떠난 이들을 향한 아웃리치
  • 반항 중인 믿는 부모의 자녀들, 특히 리더들의 자녀를 향한 아웃리치

형은 이러한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있다가 주님께 돌아오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아, 그리고 물론 가장 독특한 점은 이 공동체가 이스라엘 최초의 히브리어를 쓰는 에티오피아계 공동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에티오피아계 신자들이 암하라어를 썼기 때문에 마땅한 선택권을 갖지 못한 젊은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을 위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제가 보기에 대단한 비전이었습니다. 물론, 다비드 형은 이미 저에게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아웃리치"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데수와 스테파노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식료품점에서 제 친구 스테파노스를 만났는데, 1년 동안 대화가 없던 상태였습니다. 저희는 파티 시절에는 가장 친했지만, 1년 앞서 마약 문제로 싸웠습니다. 그것은 우연한 만남이었고, 저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스테파노스에게 예슈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사과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지 감이 안 왔습니다. 예슈아는 이스라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여느 유대인과 논하기에 매우 민감한 주제였습니다. 제가 그의 인생을 바꾸는 메시지를 전할 만큼 충분히 관계를 맺어왔는지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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