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예슈아(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히브리 성경을 읽는 랍비(교사)로 묘사된 "The Chosen선택받은 자" TV 드라마
마오즈의 배경에 대해 읽어본 적이 있다면,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가 거의 50년 동안 발전해 오면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에 대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 독자 중 많은 이들이 수십 년 동안 유대 민족의 고난과 성장의 부침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왔다. 우리가 공격을 받았을 때, 독자들은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 민족의 대의를 지지해 왔다. 현재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치러지고 있지만, 우리는 전 세계 가운데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옛적부터 변함없는 진리의 편에 섰기 때문에 여러분이 공격 받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
지금은 세상이 격변하는 시기다. 여러분도 삶 가운데 모든 것이 흔들리면서,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표면화되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흔히 오인과 오해가 가득한,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그러니 이 글을 읽으면서 인내하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이 문제들 중 일부를 잘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이제 다뤄질 문제적 이념들 중 일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경험해 본 적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이 문제들은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예슈아라는 이름이 전 세계에서 퇴색되고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 적이 강한 탑을 무너뜨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탑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우리 삼촌이 언젠가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뿌리와 하나님을 불법화하는 것이 기독교를 약화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너는 구원 받았으니 두려워 말라!
내가 이 글에서 지적하는 몇몇 주제들은 처음에는 소화하기 힘들 수도 있으니, 잠시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수 있다. 그러면 실제로 그 생각이 분명해지고 궁극적으로 해방감을 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슈아를 통해 우주의 창조주께 직접 다가갈 수 있도록 초대받았다고 믿기를 바란다. 죄의 용서,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두 우리가 새 언약을 받아들일 때 누릴 수 있는 선물이다.
하지만 성경을 지속적으로 접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해 온 주류 기독교 신앙의 영역들이 있다. 내가 기독교라는 용어를 카톨릭, 개신교, 콥트교, 그리스, 러시아, 동방 정교 등 해당 종교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여 폭넓게 사용한다는 점에 유의 바란다. 예슈아의 유대인 제자들이 전하는 원래의 메시지에서 교회의 다양한 흐름이 분기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새 언약을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 전혀 배우지 못했고, 슬프게도 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한 바로 원 나무인 유대 민족을 공격하는 영역으로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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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사랑하되 백성은 미워하라
역사에는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있다. 타락한 노아의 시대. 산 채로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던 몰렉 제단. 암흑시대 기독교 전사들의 고문법. 이러 부분들을 연구할 때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경고로 새기는 것이 주된 이유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전쟁, 대량 유수, 자연 재해 등의 상황으로 인해 지식은 물론이고 언어 전체가 사라진 놀라운 시기들이 있다. 이 소중한 역사의 조각들은 때때로 수년간의 연구 가운데 당시의 지혜가 재발견되기까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의 미라화 과정의 비밀처럼, 현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거대한 구조물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몇십 년마다 건물을 짓고 다시 지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떤 재료를 사용했길래 수천 년을 갈 수 있는 것일까? 합환채란 무엇일까? 또 길르앗의 향료는 무엇일까? 그리고 시편들은 어떤 음악적 편곡과 멜로디에 맞춰 만들어졌을까? 이 아름다운 지식이 시간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현대 기독교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도 기원 설화를 잃었다.
복음서의 이야기는 말구유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면서(계 13:8) 태초에 시작되었다. 어쩌면 개념적으로는 성경을 3부작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창조로부터 요셉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할 때까지 첫 번째 책이라고 가정해보자. 두 번째 책은 출애굽부터 시작하여 선지서 중 마지막 부분까지이며, 세 번째 책은 (구약에서 약속된)신약일 것이다.
만약 시리즈 도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3권부터 읽기 시작할 경우 등장인물과 이야기 줄거리에 대해 얼마나 많은 오해가 생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신약부터 신학을 시작한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마태복음이 그 기록을 계보로 시작하는 이유일 것이다. 독자들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도록 말이다!
1세기 유대교 신자들은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구약만으로 신약을 설명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1세기와 그 이전에 두드러졌던 지혜와 지식의 재발견을 오늘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써있네
요즘 뉴스와 SNS에서 아주 흥미로운 관전거리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반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유대 민족에 대해 요한계시록에 쓰인 표현인 '사탄의 회당', 요한복음에 나오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등 문맥에 맞지 않는 구절을 올리는 일이 드물지 않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영원한' 상태를 인식하는 동시에 스스로 새롭고 진정한 '이스라엘'로 그냥 동일시한다.
이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가 몇 세기 후에 만들어낸 것과 같은 접근 방식이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기껏해야 무지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탐욕스럽고, 권력에 굶주리고, 부패한 기독교 성직자가 가르친 기독교 신학이 계속 악화되었다.
또한 오늘날 성경의 현대 번역본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리고 그 모든 번역본(또는 원본)에 접근하는 것이 아무리 쉽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 위계상 설교와 기억하기 쉬운 구절을 통해 교리를 배우기를 선호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억 명의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 민족에 대해 이렇게 깊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자신의 삶의 빛이라고 주장하게 하는, 깊고 만연한 아이러니는 무시하기 어렵다.
세 가지 오해의 포인트
오늘날에도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유대인이라는 방주(傍註)를 우연히 발견하기까지 (평생인 경우도 많지만) 반평생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 어머니 미리암이 지어준 예수의 이름은 '예슈아'였다. 그들은 유다라는 지역에서 살았고, 오직 유대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예슈아의 추종자들은 히브리어 이름을 가진 유대인이었다. 성경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면서야 그들의 이름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조정되었던 것이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 사도는 영생의 메시지를 자신들에게 가져다 준 유대인들에 대한 (이교적 생활방식을 버리고 기독교인으로 알려지게 된) 이방인들의 압도적인 감사를 기록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미래에 적개심을 품을 가능성을 인식하고 유대인에게 자고지지 말라고 경고했다(롬 11:18). 몇 세대가 걸리겠지만 슬프게도 로마제국에서 두드러진 반유대주의 사상이 기독교에 스며들게 될 것이었다. 이런 기독교의 유대적 뿌리로부터의 단절은 전적인 은혜로 유대 민족에게 주신 언약에 접목된 것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방인들과 별도로 맺은 새로운 언약은 결코 없었다. 유대 민족,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없으면 기독교는 없다.
반유대주의는 결코 기독교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반유대주의가 곪아 터졌던 세월은 기독교의 가장 어두운 시대와 동의어가 될 것이었다. 예수라는 이름이 약자를 통제하고, 가난한 자들을 약탈하고, 그가 선사한 바로 그 자유를 파괴하기 위해 사용되던 시기 말이다.
감사하게도 최근 수십 년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깊이 파고들어 하나님의 계획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편에 굳건히 섰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진정한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있다면 그것은 몇 가지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은 누구인가? 성경에서 그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간단하게 답해보자면, 유대 민족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어떻게 그들을 고치시고 벌주시는지, 또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무엇을 계획하시는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려준다.
다음은 유대인에 대한 주제가 대두될 때 제기되는 몇 가지 질문이다.
즉, 유대인은 무엇인가? 유대인은 혈통인가, 종교인가?
좋은 질문인데, 이는 유대인들이 가진 두 가지 주요하고 독특한 요인들, 즉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자손, 히브리인 또는 이스라엘인이라고도 불리는 데서 비롯된다.
일단, 아브라함이 이삭과 야곱을 거쳐 세운 후손들이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세계 인구에 비해 늘 작은 민족 집단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지속적인 존재 자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몇 번이고 구원해 주시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 민족의 존재를 종교적 믿음과 연관 짓는 이유 중 하나다. 하나님이 안 계시면 이스라엘은 없다.
둘째, 성경에는 때로 비유대인들이 룻이나 라합과 같은 유대인들과 합류하여 그 후손들이 이스라엘 민족 혈통으로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랍비를 통해 일종의 유대교로 개종을 하는 것이 더 쉽게 이루어지면서, 외부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개종 과정을 겪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처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소수이며, 여전히 이스라엘 자손의 자연적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현실을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이런 면을 고려할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 도대체 왜 중요한가?
그들이 중요한 것은 표본이기 때문이다. 원형인 것이다(고전 10장). 그들의 예는 전 세계가 모든 인류의 창조주에 대해 배우고 그분께 도달하는 방법을 알게 하기 위해 전시된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친구 아브라함에게 헌신하신 것과 그가 하신 말씀을 하실 능력의 증거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어떻게 지키는지가 나머지 모두를 위해 약속을 어떻게 지키시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인류의 재결합을 향한 이야기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시작하는 이유다. 먼저는 이스라엘이지만, 이스라엘만이 아니다. 예배로부터 언약, 구원자, 성령과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진 성경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열방에 비추는 그 빛은 이스라엘에서 비롯된다.
예수의 십자가와 거절
일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일하길 원하셨지만, 그들은 예슈아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죽였기 때문에 지금은 저주를 받았다는 입장이다. 어린 시절에 이런 관점을 들은 나는 헷갈렸다. "저들은 왜 우리에게 그렇게 화를 내는 거지? 우리가 그랬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에 못박힌 날이 성금요일이라고 칭하며, '오 해피 데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들이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잖아. 우리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유대인들이 율법의 해석에 따라 그를 돌로 칠 수도 있었고 그를 죽일 뿐만 아니라 시체를 잔인하게 갈기갈기 찢은 후에 그를 매달아 느리고 고통스러우며, 공개적인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로마인들이라는 사실적 부분은 제쳐놓기로 하겠다.
사실, 예언자들은 그가 거절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구속 계획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암흑기 속의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죽였기 때문에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십자가에 못박힌 그를 보고, "그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아오리이다!"라면서 울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분명히 아버지께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예슈아의 요구를 계속 거부하셨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예슈아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셨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을 살해함으로써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은 누구일까?
둘째로, 수 세기 동안 조상들이 한 일 때문에 비난 받아온 민족이 또 어디 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지도자들의 죄로 인해 민족 전체가 비난 받아온 것일까?
그 시점을 넘어 복음서는 대중이 예슈아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의 성공을 질투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백성을 두려워했다"고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소리 지르며 (대신 확실한 범죄자를 석방해 달라고) 폭동을 일으킨 작은 군중들은 모두 조직된 것이었으며, 그들은 당시 유대인 대다수를 대표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슈아의 죽음을 원던 것은 예슈아가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 후 유대인들이 예슈아를 영접했기 때문에 복음의 메시지가 세계 열방에 전해질 것이었다!

신약만 자신들에게 관련 있는 부분으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은 드물지 않으며, 때로는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할 때 신약만 인쇄하기도 한다.
출처: dianagurley/flickr
새 언약이 의미있는 이유
어떤 성경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구약과 신약 성경을 구분하는 마태복음 바로 앞에 있는 그 페이지를 펴라며 한 학기의 수업을 시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찢어버리라"며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건네주신 하나의 지속적인 이야기"라며 "구(舊)와 신(新)을 분리해 생각하면 우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행보는 신약성경의 유대성을 거스르는 미묘한 세뇌의 세월과 싸우기 위한 작은 발걸음이었다. 마치 유대인들이 쓴 구약은 죽음과 파괴, 율법의 부담으로 가득 차 있고, 신약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최고의 것을 이끌어낼 줄 아는 이방인들이 쓴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성경 66권 가운데 한두 권(누가와 아마도 욥)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대인들이 쓴 것이다.
무엇보다 새 언약은 예슈아가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에 이스라엘과 맺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새 언약이라고 불리게 됐다. '새 언약'이라는 이름조차 기존에 확립된 언약의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새 언약을 믿었던 유대인들은 모세 언약을 믿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유대 정체성을 떠나 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한분이신 참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라는 용어는 이교도들의 다신교적 방식을 버리고 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밝힌 나라들 가운데서 붙여졌던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저지르는 (아무리 좋은 의미라도)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에게 예슈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 때문일 것이다. 복음의 유대적 뿌리는 너무나 핵심적인 가치였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주는 초기 가르침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유대인 메시아를 받아들이려면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 15장)
어떻게 하면 이 새 언약을 누릴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는지를 기도 가운데 숙고하기 위해 후에 예루살렘 공의회로 알려지게 되는 사도들과 지도자들의 신중한 회의가 필요했다. 베드로가 "있는 그대로" 성령을 받는 고넬료의 가족을 만난 것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암 9:11~12)이 있으리라 선포하는 옛 예언을 인용한 것을 인해 믿는 유대인 지도자들은 열방도 유대인들에게 주신 언약을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
이것이 메시아닉 유대인으로서 우리가 믿는 언약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인 여러분이 믿는 언약이다. 여러분이 접붙여진 그 언약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없으면 언약은 없다.
새 언약
거듭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올바른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관계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분 가까이에 있기를 바라는 갈망을 포함하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대부분 수천 년에 걸쳐 성경으로 알려진 책으로 수집되어 구성된 텍스트에서 비롯된다. 이 책은 하나님이 인류와 함께하신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초반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과 맺은 특별한 우정 관계에 대해 말씀한다. 그 우정은 너무나 특별한 것이라, 하나님은 책의 나머지 부분을 할애하여 그의 자손들과 맺으시는, 울퉁불퉁하지만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관계를 강조하신다.
이 후손들은 타고난 은사가 뛰어난 것 같다. 이 은사들을 좋은 일에 쓰느냐 나쁜 일에 쓰느냐는 다른 이야기다. 고통과 배신의 극적인 이야기 사이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열방을 위해 그 관계를 아름다운 곳으로 이끌어내시려는 헌신적 사랑을 거듭 강조하여 말씀하신다. 이 성취의 정점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유대 언약에 대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바를 바꾸지 않으셨고, 우리로 하여금 구속사에 동참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주셨다. 그는 능력으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먼저는 유대인에게, 또한 온 세상에게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이 글에 담긴 내용에 대해 알고 계실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내가 기도하는 것은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분리된 종교가 아닌 유대 언약의 연속으로 공개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유대인들도 새 언약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주어진 언약임을 듣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분깃을 정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