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와 순교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
몇 해 전, 미국 앨라배마주의 셀마에서 자란 남편은 이 시기에 특별히 딱 맞을 것 같은 흥미로운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것을 글로 기록해두었다.
“왜 흑인 역사를 한 달이나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하죠?” 내가 질문했다.
10학년 영어를 담당하던 셀마 고등학교의 존슨 선생님은 “너희 모두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기억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야!” 라고 대답했다.
효과 있는 정책이었다. 나는 사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시민권 운동에 대해 그 선생님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인종차별의 역사로 악명 높은 셀마에서 자랐다. 나와 내 자매들은 고등학교에서 백인 소수였다. 우리는 도시 시장 집 옆에 살았고, 아버지는 이 작은 도시에서 최초의 인종을 뛰어넘는 교회를 개척하셨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존슨 선생님은 마틴 루터 킹의 생애와 암살을 포함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내가 결코 배우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부모님을 뵙기 위해 내가 이스라엘에서 앨라배마주 버밍햄으로 가던 비행기 안, 30,000피트 상공에서 몇 년 뒤에야 깨닫게 된 것이었다.
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묵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요셉의 이야기와 닮아 있었다. 형제들에게 팔려 억울하게 노예가 되었지만, 그 잘못된 일이 결국 그를 배신한 가족뿐 아니라 온 이집트를 구하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말씀이 흑인들에게 치유와 자유를 가져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마치 응답처럼, 내 영 안에서 놀랍도록 선명한 주님의 음성을 느꼈다. “내가 아프리카인을 미국으로 데려온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이스라엘에 복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거의 동시에 내 눈은 앞 좌석 포켓 속에 있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사진을 발견했다.
단순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위한 급진적이고 혁신적이며, 선구적인 사상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13시간의 비행이었기에 나는 델타 항공의 스카이 매거진을 펼쳤고, 킹 목사의 절친이자 동역자인 앤드류 영 대사의 매우 흥미로운 인터뷰를 읽게 되었다. 여행 잡지였기에, 영은 킹 목사의 폭넓은 여행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 순간 그는 1967년에 계획된 역사적 여행과 킹 목사가 그것을 준비한 목표에 대해 나누었다.
스카이: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가 여행을 “평화롭게 하는 힘”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였나요?
앤드류 영: 그는 여행이 사람들의 문화적 인식을 높이고, 그로써 고정관념과 편견을 줄인다고 믿었습니다. “세계를 여행하고 사람들을 더 잘 알게 되면, 그들과 전쟁할 가능성이 훨씬 줄어든다.” 킹 목사는 그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스카이: 그분이 실제로 여행을 평화 수단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나요?
앤드류 영: 킹 목사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충분히 많은 여행객을 데리고 가는 꿈도 꾸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1967년 9월 성지 순례에 5,000명을 모집했습니다. 킹 목사의 목표는 한 나라만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규모의 그룹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관광을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협력하기 시작하는 방법으로 보았고, 그것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관광청과 요르단 관광청은 갈릴리 바닷가에 원형 극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들은 국경의 문을 열어 사람들이 두 나라를 오가도록 허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킹 목사와 성가대는 갈릴리 호수 위의 배에서 설교하고 노래할 예정이었습니다.
스카이: 그런데 어떻게 되었죠?
앤드류 영: 1967년 6월,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등 아랍 국가들 사이에 6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우리는 투어를 다시 모집할 수 없었습니다.

킹 목사의 사고방식은 그 시대에 혁신적인 것이었다. 앨라배마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있었다! 그 애정은 상호적이었고, 이스라엘은 그에게 전례 없는 기회를 주어 대규모 사절단과 함께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틴 루터 킹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11월로 예정된 그 여행은 6월에 발발한 6일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단지 엿새 동안의 전쟁이었지만, 그 전쟁은 말 그대로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그 여행은 새로 계획해야 했다. 그러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마틴 루터 킹은 암살당했다.
전쟁 이후에도 킹 목사는 이스라엘 문제에 있어서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당시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사회학 교수로 있던 시모어 마틴 립셋은 이렇게 직접 증언했다.
“암살되기 직전,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모금 활동 차 보스턴에 왔습니다. 저는 케임브리지에서 그를 위해 열린 저녁 모임에 참석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매혹적이면서도 감동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킹 박사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버드와 보스턴 지역의 흑인 학생들이 여러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교묘하게 한 시간 반 이상 그들을 캐묻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질문을 던졌고, 자신은 거의 발언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젊은이가 시온주의자들을 비난하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러자 킹 박사는 즉각 그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사람들이 시온주의자를 비난하는데, 그것은 곧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오. 그건 반유대주의적 발언이오!’ ”
이러한 증언들이 중요한 이유는, 킹 박사 이후에 벌어진 일들 때문이다. 킹이 암살당한 뒤 생겨난 공백 속에서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냈지만, 영향력을 얻은 새로운 목소리들은 킹의 이스라엘에 대한 입장을 왜곡했다. 킹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다음 세대가 성장할 무렵에는,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사실상 반(反)이스라엘 정서를 의미하게 되었다.
흑인들이 억압자를 “그 자”라 불렀다면, “그 자 뒤에 있는 자”는 유대인으로 지목되었다. 심지어 킹 목사의 유산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영화 셀마조차, 흑인 인권을 위해 나란히 걸으며 함께 체포되었던 동맹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마틴 루터 킹이 유대인들과 나눈 따뜻한 유대 관계에 대한 기록은 문자 그대로 지워져 버렸다.

이쯬하크 라빈 총리
라빈이 피격되었을 때 나는 15세였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의 총리였다. 이스라엘 정치에서 좌파 성향을 띠었고, 많은 이스라엘 메시아닉 신자들이 동의하지 않는 입장들을 지지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인 모두에게 지금까지도 재앙적인 결과를 낳은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고, “성경은 우리의 지침이 아니다”와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여론조사에서 인기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5년 그가 암살당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라빈은 과격한 초정통파 유대인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이후로도 그는 후회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놓고 논쟁하는 데 익숙했지만, 동시에 우리를 죽이려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적을 돕는 일, 곧 우리 스스로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말이다.
라빈의 죽음은 당시 제 세대의 젊은이들을 휩쓸었다. 아랍인들에게 자치와 땅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이웃과의 평화를 이루려 했던 그의 꿈은, 우리 세대의 절박한 외침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10월 7일의 공격은 이스라엘 국민들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라빈의 평화의 꿈을 산산이 부수며, 우리가 결코 적들을 바꿀 수 없다는 현실을 다시금 직시하게 했다. 이슬람주의를 따르는 이웃들은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모든 배경이 최근 있었던 암살 사건과 연결되는 것이다…

찰리 커크
찰리 커크가 내 눈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살고 있기 때문에, 미국 대학이나 국내 정치가 이스라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 특히 전쟁 중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그의 죽음 소식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을 때, 부끄럽게도 이스라엘 기자들 가운데 찰리 커크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극히 적었다. 이는 놀랄 일도 아니었는데, 언론은 대개 자신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만 붙들고,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스라엘 언론인들과는 정반대 스펙트럼에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그가 대학 캠퍼스에서 막 시작했을 무렵 제작한 “내가 틀렸음을 증명해 보라” 영상 몇 편을 본 적이 있었고, 그것들이 기발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찰리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러다 한두 달 전, 누군가 한 클립을 보내주었다. 그것은 찰리 커크가 한 이스라엘 학생과 대화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학생은 캠퍼스에서 친팔레스타인 진영으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은 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 보고했지만 학장과 캠퍼스 경찰은 사실상 무시해 버렸다고 했다. 그러자 찰리는 그 젊은 이스라엘 학생에게 헬스장에서 체력을 기르고, 자기 방어술을 배우며, 곰 퇴치 스프레이까지 지니라고 했다.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유대인을 사냥하는 시즌입니다. 끔찍한 일이죠.”라고 말했다.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찰리에게 매료된 것은 단순히 그가 이스라엘을 지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많은 사역자들이 아름답게도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를 옹호해 왔다! 그러나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단순히 “성경 말씀이니까”라는 식의 포괄적인 지지를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절대적 헌신을 표현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행하는 모든 일이 완벽하지는 않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완전함이 분명히 드러남에도 그의 지지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지지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국가로서 내리는 일부 결정들에는 도전하고 싶습니다”라는 태도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의 낙태와 젠더 교육에 대한 열정적 지지였다.) 찰리는 자신이 믿는 바를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고, 다른 이들도 그것을 알기를 원했다. 감정적인 뉴스나 선전에 쉽게 휘둘리지 않도록 말이다.
나는 이 사람의 말을 더 듣고 싶었다. 분명 그는 모든 일에 이런 접근 방식을 취했다. 어떠한 신학, 교단, 정당도 그로부터 무조건적인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그는 모든 것을 시험했고, 모든 것을 탐구했다. 그리고 항상 다음에 만나는 낯선 이와의 대화가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고 자신의 의견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그리고 나서…
불과 몇 주 전부터 나는 거의 매일 찰리의 무언가를 듣기 시작했다. 대학 토론들이 가장 흥미로웠다. 일부 젊은이들은 그에게 소리치며 자기 주장을 쏟아냈다. 찰리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먼저 앞으로 나오게 하기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했다. 나는 ‘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들어주는 어른이 과연 또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권위자들—학교 선생님들부터 청소년 사역자들까지—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자신들의 ‘진리’만을 제시한다. 추가 질문을 해봐야 대개 “내 말이 옳으니까 따라야 한다”는 대답만 돌아온다.
찰리는 마치 아버지가 비틀거리는 아기의 손을 잡듯, 젊은이들을 자신의 사고 과정으로 이끌었다. 그는 상대방의 의견에 도전하면서도 어떻게든 존중과 격려를 잃지 않았다. 그는 군중 속 반대 목소리들을 진정시켜, 도전자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대중에게 가르친 가장 큰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토론 주제보다 더 큰 것을 가르친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에 100%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건강한 소통은 단순히 주제에 합의하는 것보다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이 젊은이들이 그의 신념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사랑 많고 인내심 있는 ‘형’ 같은 그의 존재감에 끌린 이유일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한밤중에 큰딸에게 온 문자를 받아 읽게 되었다. “찰리 커크가 총에 맞았어요. 그가 죽었어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죽을 리 없었다. 이제 막 그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아직도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다가가야 했다. 그가 곧 이스라엘에 온다고 들은 상태였다. 나도 그가 말했던 것들에 대해 물어볼 후속 질문들이 있었다. 그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드물게 나타나는 독특한 리더십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격렬히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가정에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는 스스로도 귀여운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에리카와 함께 큰 가정을 꾸리기를 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정당화할 수 없는 죽음에 낯설지 않다. 우리의 역사이자 현재 삶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끔찍한 순간에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몇 달 전까지 존재조차 몰랐던 한 남자로 인해, 이상하게도 ‘고아가 된 듯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삶을 어린아이처럼 바라보았다. “가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세우고 행복하세요!” 그가 그렇게 말할 때 깨달았다. 결혼과 자녀를 낳는 것이 우리 문화 속에서 얼마나 자주 짐과 나쁜 선택으로 조롱당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아메리칸 드림’이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 하신 명령이라는 것을.
찰리는 이런 드문 롤모델 같은 사람이었다. 그를 바라보며 ‘나도 하나님을 더 열심히 추구할 수 있다. 스스로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내가 이렇게 느꼈다면,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며칠 동안 사람들이 그 깊은 상실감을 안고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찰리의 아내 에리카가 가득 찬 경기장과 1억 명의 온라인 시청자들 앞에 섰을 때, 내가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였다.
“와, 찰리는 정말 결혼 잘 했구나!”
나는 예루살렘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 추모식을 시청하며 말했다. “너희가 나중에 커서 오늘의 세부적인 기억은 희미할지 몰라도, 이 역사적인 사건을 자녀들에게 반드시 이야기하게 될 거야. 이 모든 것은 큰 무언가의 시작이야.”
— USA 투데이 네트워크, 로이터 커넥트
유산
전 세계적으로 슬픔과 애정의 강렬한 물결이 퍼져 나가는 가운데, 역사가 늘 증언해온 것처럼 두 가지 일이 분명히 일어날 것이다. 첫째, 어떤 사람이 이토록 깊이 사랑받는다면, 그는 다른 이들에게 그만큼 강렬하게 미움도 받을 것이고, 따라서 그의 유산을 훼손하려는 시도가 거세질 것이다. 둘째, 마틴 루터 킹 목사 때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서 유대인의 맹렬한 적들은 이스라엘을 변호하는 찰리의 목소리를 무력화하려 할 것이다.
이미 소셜 미디어에서는 편집된 영상들을 퍼뜨리며, 찰리가 여러 사안—이스라엘을 포함한—에 대해 입장을 바꾸고 있었다거나, 심지어 “찰리가 뭔가 큰 것을 밝혀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암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라는 식의 주장까지 하고 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누군가는 선이라고 부르고 다른 이는 악이라 부르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더욱 어려운 것은, 그 분열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리가 믿었던 모든 것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조차 그의 고결함과, 반대자들 사이에서 더 열린 대화를 이루려는 그의 열망을 높이 평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격려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찰리는 예슈아에 대한 믿음과 대화에 대한 열정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 한 여인이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을 길러야 하는 이 인간적 비극 속에서도, 만일 은혜의 빛줄기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번 사건이 새로운 서구 세계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단순히 자유로운 발언을 허락하는 것을 넘어서, 자유로운 사상의 교환 자체를 자유롭고 건강한 사회의 필수 요소로 여기는 서구 말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들이 단지 서로 대화하게 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스라엘의 신자들과 함께 서십시오
마오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땅 구석구석에 예슈아의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부는 믿는 자들을 훈련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이 영원한 사역에 동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