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기자 다윗
Worship
리사 스튜어트는 게으른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조부모는 각각 12개 정도의 언어를 구사했고, 할아버지는 러시아 차르에 대항하는 혁명의 스파이였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차르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습니다. 리사는 할아버지의 본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항상 지하 가명으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조부모는 민주 러시아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결국 1921년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고, 3일 후 리사의 어머니가 태어나는 시기에 맞춰 도착했습니다.
리사는 2세 미국인으로 자랐지만, 러시아계 유대인이라는 뿌리는 어린 시절, 특히 좋은 교육의 중요성에 있어서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미시간에 있는 그녀의 마을에서 가장 좋은 학교는 루터교 학교였고,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루터교 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리사는 어린 시절부터 신이 존재하는지 알고 싶은 깊은 갈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학교 루터교 성직자들이 제공하는 답변에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질문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리사는 1960년대 대학가의 환멸과 반항심에 사로잡히던 시기에 맞춰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영적인 진리를 찾아 헤매던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신께서 제게 손을 내밀어 주셨다는 걸 알아요."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모든 어둠의 영적 수행을 시도해 보고 온갖 환각제를 복용했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모두 마약에 중독되어 있던 친구들이 제가 마약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들은 모두 감옥에 가거나 세상을 떠났죠."
결국 그녀는 그런 풍경에 싫증이 나서 은둔자의 삶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녀가 아는 가족의 친구가 워싱턴주 올림픽 국유림에 120에이커(약 48만 8천 제곱미터)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땅에는 오래된 오두막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땅과 오두막 전체를 리사에게 1년에 1달러에 임대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리사는 오두막을 수리하고 80km(50마일) 떨어진 대학에서 학위를 따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두막에서 가장 가까운 문명의 흔적은 약 8킬로미터 떨어진 외딴 주유소뿐이었고, 리사는 그곳을 자주 걸었다. 며칠 전 그녀를 태워준 남자가 술에 취해 오두막에 들어와 침입하려 했던 어느 날 밤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위안의 삶이었다. 그 후 리사는 베개 밑에 권총을 넣고 잠을 잤다. 하지만 그것이 리사의 유일한 "사건"이 되었다.

데이비드
데이비드 로든 역시 미시간 출신이었지만, 그의 가족은 정치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대대로 농부로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음악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에게 데이비드라는 이름은 참으로 적절했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공부하고 소년 합창단에 가입했으며, 여덟 살 때부터 바흐와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받아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종교심이 없었지만 합창단의 웅장한 소리를 좋아했습니다. 결국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그는 다른 합창단에 합류하여 16세에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열아홉 살에는 오페라를 공부했고, 몇 년 만에 브로드웨이에 진출했습니다.
작곡가에서 배우, 오페라 가수, 조명 디자이너까지 데이비드의 재능, 기술, 다재다능함 덕분에 그는 미국 전역의 조프리 발레단에서 무대 관리자, 그리고 결국 제작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일의 일환으로 몇 달 동안 시애틀에 머물렀습니다.
시애틀에서 바쁜 일정에 지쳐 잠시 쉬고 싶었던 데이비드와 친구 한 명은 올림픽 국유림에서 일주일 동안 캠핑을 하기로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개울가에서 잡은 생선을 먹다가, 드디어 정통 버거를 먹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벌목꾼들이 득실거리는 외딴 주유소에서 그들은 캠핑을 시작했습니다.
덩치 큰 남자들이 점심을 먹으러 들르는 외딴 주유소에서 그들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모든 것 중에 대학 교과서가 높이 쌓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스러운 리사
리사는 책에서 눈을 들어 두 젊은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그중 한 명에게 곧바로 마음이 끌렸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다가 리사가 자신의 오두막 쪽으로 가는 거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몇 분 후, 데이비드는 차를 돌려 리사를 집으로 데려다주기로 했다. 리사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작별 인사를 할 무렵, 신이 자신을 데이비드라는 사람과 함께하도록 운명지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이비드는 리사에게 발레단과의 그 해 계약을 완료해야 하지만, 계약을 완료하는 대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데이비드는 발레단과의 계약을 마무리하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지만, 리사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편지를 잘 쓰는 타입이 아니었고, 리사의 성(姓)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남은 6개월 동안 그는 워싱턴주 사포에 있는 리사 더 러블리에게 보내는 세 통의 편지를 썼다. 리사가 그 편지를 받았다.
데이비드가 워싱턴으로 돌아왔을 때, 그와 리사는 서로에게 깊은 헌신을 느꼈고, 결혼 허가증을 받기 위해 리사가 사는 대학가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리사는 사이언톨로지 교 목사인 친구를 알고 있었는데, 그는 결혼식을 집전하고 허가증에 서명해 주었습니다. 당시 점성술에 관심이 많았던 데이비드는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오전 7시에 결혼해야 한다고 계산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 오전 7시가 되어도 목사는 오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은총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데이비드와 리사는 근처의 히피족 몇 명을 증인으로 세우고 결혼했습니다. 결국 목사가 도착하여 계약서에 서명하고 법적으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데이비드와 리사는 작은 오두막에서 살았고 데이비드는 지역 벌목장에서 일했습니다. 벌목꾼들은 히피족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데이비드는 벌목장 관리자인 멀이 예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히피족은 항상 그의 집을 방문했고 멀의 아내는 끊임없이 요리하고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당신은 왜 여기의 다른 벌목꾼들과 다릅니까?" 데이비드가 마침내 어느 날 그에게 물었습니다. 멀은 예수님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고 이것이 기독교인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몇 주 동안 그들은 퇴근 후 하루에 많은 시간을 믿음과 진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데이비드의 질문에 많은 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데이비드가 멀을 믿을 수 있다고 믿게 만든 것은 멀의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데이비드는 교회를 방문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집에 와서 리사에게 자신이 주님께 삶을 드렸다고 말했습니다.
리사의 첫 반응은 이런 가족 친화적인 기사에 공유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종교를 공부했고 예수는 허구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데이비드는 그녀가 경멸하게 된 피상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위선적인 교회 세계를 받아들였고, 그녀는 격분했습니다. 그 후 몇 주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논쟁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인정하건대, 지금까지 시도했던 다른 모든 방법들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녀의 많은 질문에 답하는 데이비드의 평화로운 태도는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짜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리사는 데이비드가 멀을 방문할 때 함께 가겠다고 고집했습니다. 비록 데이비드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습니다. 멀과 그의 가족이 발산하는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그리고 그가 던진 질문, "당신이 시도해 본 다른 모든 종교에 준 것과 같은 기회를 예수님께 드리는 건 어때요?" 리사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죄인의 기도"를 마치며 그녀는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2주를 드리겠소."
리사는 진지했습니다. 예슈아를 잠재적 진리 목록에서 지우고 싶다면, 솔직하게 시도해 봐야 했습니다. 2주 동안 온 힘을 다해 멀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다른 신자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리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건 별로 재미없었지만, 다른 신자들과 만나는 건 쉬운 일이었어요."

2주 후, 데이비드와 리사는 복음을 전하러 데려갈 다른 두 부부와 함께 교회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데이비드와 리사는 십일조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가 있었기에 우유로 십일조를 바치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타이어가 터지면서 밴이 경사로 아래로 세 번 뒤집혔습니다. 우유와 휘발유가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데이비드는 리사가 "예수님, 도와주세요!"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차가 마침내 멈췄을 때, 리사는 더 이상 옆 좌석에 없었습니다. 거꾸로 매달린 데이비드는 급히 차에서 내려 밴 아래에 파묻힌 리사를 발견했고, 차량의 무게가 리사의 하체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같은 교회로 가던 벌목꾼 두 명이 사고를 목격하고 달려가 리사에게서 차를 들어 올렸습니다.
리사는 예슈아께 부르짖은 기억이 없었지만, 사고로 인한 고통이나 트라우마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존재를 느꼈고, 그 순간 예슈아께서 실제로 살아계심을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병원에서 리사는 갈비뼈 세 개와 고관절, 그리고 골반이 골절되어 약 3개월 동안 깁스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고 당시 밴에 함께 타고 있던 친구 주디 역시 오랜 회복 기간을 거쳐야 했습니다.
머얼은 이 소식을 듣고 식당의 모든 가구를 치우고 침대 두 개를 들여와 리사와 주디를 돌보았습니다. 주디와 그녀의 남자친구(그 역시 사고 현장에 있었음)는 이 기간 동안 주님께 헌신했고, 주디가 병원에 있는 동안 공식적으로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회복 후 약 6주가 지나자 데이비드는 침수에 대해 알게 되었고 멀에게 물에 들어가 보라고 했습니다. 리사는 그 경험에서 소외될 수 없었습니다. 깁스를 한 채로는 물에 들어갈 수 없기에, 리사는 스스로 깁스를 벗고 물에 몸을 담갔습니다. 50년 전의 일이지만, 그 이후로는 부상으로 고통받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예배에 참석했을 때 목사님이 설교를 하며 이스라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말씀이 리사의 마음속에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예슈아를 믿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데이비드도 그 마음을 느끼고 성경을 바탕으로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3년 동안 그들은 서부 해안과 캐나다를 오가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노래하고 연주하며 간증했습니다. 여행과 사역은 매우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데이비드와 리사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감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1973년, 그들은 캐나다의 한 예배 캠프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머브 왓슨과 멀라 왓슨은 유대교적 색채를 띤 초기 예배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리 소르코람과 결혼하기 전, 6년 전 이스라엘로 이주한 쉬라 린제이를 만났는데, 그녀는 이스라엘로의 알리야(이민)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 데이비드와 리사는 캐나다에서 알리야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메르브와 멀라가 유럽 음악 투어를 계획하기 시작했을 때, 이러한 행사 기획 경험이 풍부한 데이비드가 그들의 여행 계획을 도왔습니다. 그 무렵 데이비드와 리사의 알리야 서류가 승인되어 투어에 합류했고, 그곳에서 이스라엘행 편도 티켓을 구매했습니다.

이스라엘로 가다
이스라엘에서는 늘 그렇듯,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을 수용하기로 했던 수용소가 꽉 차서, 80파운드를 가지고 데이비드와 리사는 작은 호텔 방에 쑤셔박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네타냐에서 처음 2년 동안 히브리어를 공부했고, 졸업 후 네타냐 외곽에 집을 빌렸는데, 쉬라도 그곳으로 이사할 예정이었습니다.
그 무렵, 캘리포니아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났던 쉬라는 배우 아리를 만나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집이 이스라엘에 있다고 확신시켰습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에 도전하기로 결심했고, 6개월 만에 아리와 쉬라는 결혼했습니다. 같은 해에 그들은 마오즈 이스라엘을 설립하고 다비드와 리사 근처 네타냐로 이사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집에서 소그룹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집회를 열 더 넓은 공간을 찾던 아리와 쉬라는 네타냐에서 남쪽으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헤르츨리야에 집을 빌릴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집주인이 몇 년 전 살해당한 후로 그 집은 폐쇄되고 버려져 있었습니다. 덕분에 임대료는 저렴했지만, 곰팡이 핀 지하실을 새 모임 장소로 꾸미는 일은 애정 어린 작업이었습니다.
함께 모이게 될 지역 신자들의 기대감이 컸고, 곧 헤르츨리야 교회에는 약 70명의 참석자가 모였습니다. 아리와 쉬라는 문화와 언어적으로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회중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임에서 히브리어로 찬송하는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첫째, 히브리어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곡이 거의 없었습니다. 둘째, 당시 이스라엘에 살던 신자들은 대부분 미국 자원봉사자들과 히브리어로 식료품을 사는 기본적인 방법을 막 배우고 있던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르코-람 부부가 히브리어로 예배하는 것에 열정을 보인 것에 대한 반응이 별로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예배하는 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감동적인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어가 요구하는 후두음으로 낯선 가사를 부르는 것만큼 이민자들에게 친밀감을 해치는 것은 없습니다. 아리와 쉬라는 로덴 부부에게 자신들의 어려움을 털어놓았고, 신도들이 그 생각에 익숙해지도록 돕기 위해 1년 동안 그곳으로 내려와 예배를 맡아주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소르코-람 부부가 히브리어로 말하는 최초의 성령 충만한 이스라엘 회중의 시작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로덴 부부는 네타냐에서 그들만의 메시아닉 회중을 시작했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
히브리어 예배에 대한 비전을 더욱 확고히 하면서도, 데이비드는 엄숙한 영국 찬송가의 번역본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히브리어 성경을 바탕으로 주변 문화의 음악에 맞춰 노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개척할 음악은 유대 문화의 축제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춤을 좋아합니다!) 흥미롭게도,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로 예배하고 축하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시기에 전 세계 기독교인들은 각자의 교회에서 축하 노래를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놀랍게도)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데이비드는 계속해서 찬양곡을 작곡했지만, 클래식 음악에 대한 첫사랑은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처럼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성경이 교향악단과 함께 전파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또다시 회의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아리와 쉬라는 그 가치를 바로 깨달았습니다. 마오즈 지지자들은 이에 동의했고, 수년간 로덴 부부의 사역에 수만 달러를 기부해 왔습니다.
데이비드는 진실하고 참된 회개를 강조하기 위해 오페라 ' 다윗과 밧세바' 를 포함한 수많은 작품을 작곡하고 제작했습니다. 그는 또한 히브리어로 된 헨델의 상징적인 고전 작품 ' 메시아' 를 제작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는 본질적으로 메시아 예슈아의 강림에 대한 구약과 신약 성경을 두 시간 동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 다른 메시아 선구자인 아리에 바르 데이비드와 함께 데이비드는 가사를 한 줄 한 줄 음악에 꼼꼼하게 맞춰 넣었습니다. 이 상징적인 작품 덕분에 데이비드는 지난 10년 동안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지식인을 포함한 수천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슈아에 대한 이 당당한 메시지를 히브리어로 원곡으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형태로든 이 메시지는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공개적으로 전달되기가 여전히 어렵습니다.
리사는 최근 쉬라에게 "텔아비브에서 오페라를 공연했을 때, 당신과 아리는 그 오페라를 믿었기에 열렬히 지지해 준 사람들이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극장은 거의 만석이었고, 신자들은 당신 덕분에 믿지 않는 친구들을 데려올 수 있었어요.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로 인해 많은 간증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문화와 예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 메시아닉 공동체에서는 예술과 문화가 세상에 미칠 수 있는 잠재력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초기 이 땅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직접 작곡한 노래가 몇 곡 있긴 했지만, 다윗은 히브리 예배 노래집을 최초로 출판했고, 메시아닉 유대 음악을 녹음하여 전 세계에서 불릴 수 있도록 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Roni Bat Tzion"과 같은 그의 노래는 메시아닉 음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 되었고, 영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실제로 마오즈의 ' 어린이를 위한 음악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어린이들 중 일부는 그의 클래식 곡을 학습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와 리사 로덴 부부는 오늘날에도 네타냐에 살고 있으며, 그들의 단체인 캄티를 통해 전 세계에서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하신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상상력을 사로잡아 그들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온 세대의 예배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험으로 인도하시는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데이비드의 음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는 언제나 이스라엘의 메시아닉 유대교 음악 운동의 아버지로 기억될 것입니다.
데이비드와 리사 로든처럼 기성 아티스트는 물론, 이제 막 데뷔한 젊지만 재능 있는 음악가들을 마오즈 이스라엘에서 지원해 주세요. 시편 작가를 후원하거나 그들의 활동에 필요한 악기를 지원해 주세요.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시든, 위대한 왕의 도성에서 예배의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을 확신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심장, 예루살렘에서 울려 퍼지는 그 장엄한 소리, 즉 노래, 목소리, 악기, 춤, 그리고 예배를 인도하는 데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자들과 함께 서십시오
마오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땅 구석구석에 예슈아의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부는 믿는 자들을 훈련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이 영원한 사역에 동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