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오즈 이스라엘 보고서 7월, 2020

장악 당한 신약

딸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다른 모든 어머니들과 같은 꿈을 꾸었다. 머리를 묶어주는 데서부터 웨딩 드레스를 입히기까지 모든 것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신부이자 유능한 아내가 되도록 키우고, 언젠가 손주들로 보상 받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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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ni Ferguson
으로 Shani Ferguson

딸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다른 모든 어머니들과 같은 꿈을 꾸었다. 머리를 묶어주는 데서부터 웨딩 드레스를 입히기까지 모든 것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신부이자 유능한 아내가 되도록 키우고, 언젠가 손주들로 보상 받기를 바랐다!

딸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모든 바람은 무너져 내렸다. 크면서 결국 사라져버리는, 모든 아이들이 겪는 그런 발작의 수준이 아니었다. 초자연적이라 할만큼 거칠도록 폭력적인 것이었다. 이제 아무도 그녀의 딸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자녀가 있었다면, 아무도 그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들이 신들의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알지 못하는 신의 능력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한 사람이 근처에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녀의 민족이 경배하는 신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겐 상관이 없었다. 분명 그녀가 믿는 신들은 그녀의 고통에 대해 무능하거나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제 딸에게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침내 그를 찾게 된 그녀는 간청하면서도 흥분해서 말했다.

그는 그녀를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했는데, 할 때마다 혹시 안 들렸을까봐 좀 더 크게 말했다.

그래도 그는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가 본 반응은 그의 곁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이 보여준, 짜증 섞인 눈치 뿐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해야겠다. 어쩌면 내가 그냥 구걸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제 딸이 악한 세력 때문에 끔찍히 힘들어하고 있어요.” 그녀는 이렇게 시도했다.

구경꾼 중 한 명이 드디어 말을 했는데, 그녀에게 한 것이 아니라 그 남자에게 한 것이었다. “저 여자를 빨리 보내버리세요. 모두에게 방해가 되고 있어요.”

그녀가 고집을 부리자 그 남자는 마침내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의 민족을 도와주려고 온 게 아닙니다. 저희 민족을 위해 온 것이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기로 되어 있는 이 귀한 선물을 취해 개들과 다름 없는 민족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모두 알 것이다. “개들조차 부스러기를 받아 먹습니다.” 예슈아께서는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으셨고 여인은 자신이 찾아온 이유가 되는 ‘부스러기’를 받았다. 그녀의 딸은 놓임을 얻었고 그녀의 이야기는 성경에 불멸토록 새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은, 예슈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당신을 찾아온 모든 이방인들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갖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예슈아께서는 세계 열방을 구원하러 오신 게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오셨다. (마 15:24)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 22:20) 이 언약이 “새롭다” 불린 것은 다른 언약들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시작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슈아께서 죽으셨을 때, 아니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을 때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잔치에 초대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잠시 곱씹어보아야 한다. 예슈아를 따르도록 부르심 받은 모든 제자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직계 후손들이었다. 성령이 임한 날 하나님의 왕국에 더해진 수천 명의 새 신자들은 철저히 유대인들이었으며, 그중 다수는 유대 절기 샤부옽(초실절)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방문 중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부담스럽다고 여기는 토라의 규례들은 예슈아와 그 추종자들에게 단순히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예슈아와 제자들이 함께 다닌 3년 후, 성령 강림 이후에도 유대인으로서 이들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회당과 성전에 다녔다. 그들은 결코 부정한 음식을 먹게 되는 “자유”를 바라지 않았고, 일요일 모임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일요일은 이스라엘에서 근무일이다.

예슈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예수 혹은 지저스Jesus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없다. 당신의 어머니 미리암은 마리아라 불린 적이 없고, 예슈아의 형제 야고보도 그로부터 천 년도 더 지나서 제임스 왕King James이 붙여준 이름 제임스James로 불린 적이 없다. 이들은 부활절, 성탄절 혹은 사순절을 기념하지 않았다. 새로운 종교를 시작한 적도 없다.

고넬료를 만나는 베드로 – 출처: GoodSalt

그 이후에 뒤바뀐 세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다가가라는 위임을 예슈아의 제자들은 분명히 이해했다. 나중에 세상이 뒤바뀐 것이다. 초자연적 조율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와 시몬 베드로 사도가 만나게 하셨다(행 10장 참조). 고넬료는 백부장이었는데, 다른 이방인들처럼 예슈아께 다가갔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보았다. 고넬료에게 나타난 천사는 그의 헌신된 기도와 유대인들을 향한 베풂으로 인해 그를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새 언약에 최초로 초청 받은 비유대인이 된 것이다.

시몬 베드로는 항상 허락된 것의 한도를 확장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는, 횡설수설하는 떠벌이였다. 이로 인해 그는 유대인으로서 생각하기에 비정상적인 일을 하기에 적합한 후보자였다. 곧 유대 민족의 새 언약을 ‘부정한 인간’인 이방인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넬료의 사환들이 그가 머무르고 있던 욥바에 도착하기 직전에 시몬은 하나님께 어려운 환상을 받는데, 여기서 그는 비유대인들의 참된 지위에 대한 천상의 관점을 본다.

고넬료의 집에 도착한 시몬 베드로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행 10:28-29)

그 다음은 시몬 베드로가 천사가 고넬료를 찾아왔었다는 말을 듣고 예슈아 이야기를 전해주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에 충격을 받는 내용이다. 시몬은 즉시로 하나님께서 “규칙을 변경하셨다”는 것(최소한 그가 이해하는 관점에서는 그랬다는 것이다.)과 그들 모두가 유대 민족의 영적 예식인 침례에 참예하게 하셨음을 인식했다. 그 결과, 시몬은 다른 유대인 신자들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다가 결국 사건 전체가 일어난 초자연적인 전개를 그들에게 나누게 되며, 그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제 다른 민족들도 당신의 우리에 받아주심을 알고 놀란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18)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건 유대인들의 새 언약이 이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수년 간의 열띤 토론이다. 바리새파 출신의 신자들(그렇다. 그런 이들도 있었다. 행 15:5 참조)은 새 언약에 참예하려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몬 베드로, 바울, 바나바는 스스로 유대적 예식을 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은 새 언약을 그저 믿음으로 포용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증거를 보였다. 그 결과, 유대인 지도자들은 몇몇 근본적 논점에 합의하고 새 언약 안에 계속 있기를 원하는 비유대인들을 위한 도덕성과 아량에 대한 지시 사항을 발송했다.

수년이 지나고 큰 숫자의 이방인들이 로마 제국 전역에서 참 유일신 하나님의 아들 예슈아를 통해 구원과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이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는 헬라어로 “작은 기름 부음받은 사람들(기름부음 받은 이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새 언약을 열방에 전한, 배운 유대인 사도들은 처음에만 있었다.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때려부수고 많은 유대인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다. 흩어진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숫자에 비해 너무 적어, 교회 교리의 상당수는 유대적 이해와 무관하게 발전되었다. 성경이 커다랗고 무겁고 비싼 두루마리에 기록된 상황에서, 이 그리스도인들 중 다수는 성경의 일부 밖에 접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성경의 절반이라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세대를 거치면서, 구원자 예슈아의 메시지는 계속 전해졌고 신약의 서신들이 널리 회신되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그 맥락은 완전히 잊혀졌다. 유대인들의 입력이 없이, 이제 기독교라고 알려지게 된 예슈아에 대한 이방인들의 신앙은 암흑기를 거친다. 온갖 이교적 문화, 우상숭배 그리고 위계질서와 함께 제도화되어, 상황에 따라 규칙들을 만들어냈다.

유대인들은 숭배하기 위한 우상을 만드는 게 옳지 않음을 알았지만, 이교적 배경을 가진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신상들을 세우고 거기에 기도했다. 그리고 많은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새 언약에 선민 이스라엘과 함께 포함될 수 있음에 감사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새 백성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감사하게도, 지난 세기, 상당한 오류들이 바로잡혔다. 하지만 오늘날도 “관련성이 덜한” 구약은 빼고 신약 성경들이 인쇄되고 있는 가운데 이런 접근법을 고수하는 남은 자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설교자들이 교인들에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약속하신 것을 보면, 그냥 이스라엘은 여러분의 이름으로 대체하세요. 이스라엘이라고 하신 말씀들은 여러분을 생각하고 하신 말씀이거든요!”라고 가르치는 것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짚고 넘어가자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약속하신 축복들을 구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다. 조건은 애초의 약속이 이스라엘을 위해 명백히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펼친 역사적 맥락이 필수적인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아래 질문에 대해 동일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황당무계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유대인들에게 예슈아를 전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최근 불을 지폈는데, 이스라엘에서 4월에 한 방송국이 개국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최초로 히브리어/아랍어로 유대인 메시아 예슈아에 대해 방송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스라엘의 영향력 있는 유대인들이 이 채널의 방송에 반대를 했다는 건 놀라울 게 없었다. 모두가 놀랐던 것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채널의 방송에 격렬히 반대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대응을 하기 전에 그들의 사고를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온갖 갑론을박을 보면서 나는 많은 의견 불일치 지점이 뉘앙스에 의한 것이며 핵심 논점과는 무관한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이 글을 통해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이스라엘에서 TV 채널이 존재해야 되느냐, 혹은 전도에 있어 특정 신학적 접근이 다른 접근보다 낫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약의 메시지를 유대 민족에게 전해야 하느냐다.  

장악 당한 언약

집에 사람들을 초대한다고 생각해보라. 이 집은 조상들로부터 수 세대에 걸쳐 물려 받은 곳으로, 아름다운 보석과 꽃병, 그림들과 가구가 있다. 들어서면 손님들이 그 집의 아름다움에 경탄한다. 그런 집은 본 적이 없어서 뭔가 하나 만져보려면 허락을 구하게 된다.

이후로 사람들이 자주 다시 찾아오는데, 친구도 데려온다. 곧 그들은 집에 익숙해져서, 나의 안내가 없이도 친구들에게 뭐가 뭔지 소개를 해준다. 처음 내가 데려온 손님들은 더 많은 친구를 데려오고, 그 친구들이 또 다른 친구들을 데려온다. 최근에 새로온 이들은 나는 거의 쳐다도 안 본다. 이상한 기분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집의 고풍스러움에 놀라고 기뻐하는 모습은 좋다. 사람들은 이제 유명해진 우리 집 앞에서 사진을 찍고자 떼로 몰려오고 넋을 빼앗긴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동네 가까운 데로 이사해서 더 자주 찾아오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왔더니 집이 사람들로 가득하다. 친구들의 친구들의 친구들… 그리고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본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지만, 대문 근처의 사람들은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며 이런 동네에 사는 사람 같지 않다고 판단해버린다. 그리고 못 들어가게 한다.

그러다가 생각이 바뀌었는지 한 사람이 제안한다. 자기들 같은 스타일로 옷을 갈아입고 온다면… 이 집을 구경할 수 있도록 들여보내줄 지도 모른다고.

마당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누군가 2층에서 창문을 열고 가장 오래된 내 토기 화병 여러 개를 집어던진다. 내가 그렇다고 한 것처럼, 그 화병들도 자신들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는 거다.

이 시나리오의 느낌을 상상해볼 수 있어야만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 신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언약에 담긴 축복들을 탐닉하다가는 우리와 우리 민족이 바로 그 언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올 것이다.

바울 사도가 목숨을 걸고 예슈아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그 이방인들의 후손들이 바로 자기 민족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왕국을 차단시키려 하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하다. 자기 민족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예슈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2~3)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내가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건 전적으로 불필요하고 심지어 비효율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민족의 새 언약에 접붙여졌다. 유대인들이 기독교 언약에 접붙여진 게 아니다. 이방인식 기독교적 삶을 위해 유대적 유산을 져버린 유대인들은 죄사함과 영생의 유익을 누릴지 모르나, 이스라엘에 주신 하나님의 고유한 소명은 놓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민족 집단에게 다가가는 것과 똑같이 유대 민족에게 전도하러 달려가기 전에 유대 민족의 독특성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슈아의 이름으로 수 세기 동안 저지른 참사들이 많기 때문에 많은 다리 놓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다음에 나오는 글 “교회사에서 안 가르쳐주는 이야기” 참조)

물론 외부에서 이방인들을 파송하는 것보다 믿는 유대인들이 직접 동족에게 전도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심지어 전반적으로 더 적절하다는 주장도 마땅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새 언약에 대해 듣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름 아닌 자신의 구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한 철저한 무지를 드러낸다. 기억하라. 예슈아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고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예슈아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서에서 당신의 “기업”이라고 애정 담아 말씀하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렬한 사랑을 막아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온 인류를 당신께로 회복시키는 것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의도였다. 세례 요한은 예슈아를 보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런데 구출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규칙을 정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유대 민족을 취해,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예슈아를 거부할 것을 아셨고, 그 거부를 사용하사 열방으로 나아가셨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감사를 표현할 차례다. 이스라엘에 대한 기도의 부담을 지고, 또 그들을 시기나게 함으로 말이다.

이 질투 유발은 그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지원하고 교회사에 대해 사과하는 것만으론 안 된다. 이스라엘은 이미 언약을 받았기에 또 다른 언약이 필요 없다고 선포하는 것은 더 나쁘다.

오히려 이방인들의 변화된 삶과 옛적부터 계신 이와 친밀히 교제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이 먼저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새 언약을 통해 가능했음을 발견할 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