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오즈 이스라엘 보고서 2월, 2020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의 막대한 가격

암흑기는 가히 천 년에 가깝도록 유럽을 덮고 있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다른 이름을 가진 종으로 존재했다. 유럽 인구의 8~90%는 영주 혹은 “지주"를 위해 일하는 농노였다. 그들의 식량을 재배하고 그들의 가축을 키우며, 그들의 곡식을 제분하고 그들의 물레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들과 그들의 지주들은 사실상 자급자족하는 경제 경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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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ra Sorko-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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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암흑기는 가히 천 년에 가깝도록 유럽을 덮고 있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다른 이름을 가진 종으로 존재했다. 유럽 인구의 8~90%는 영주 혹은 “지주”를 위해 일하는 농노였다. 그들의 식량을 재배하고 그들의 가축을 키우며, 그들의 곡식을 제분하고 그들의 물레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들과 그들의 지주들은 사실상 자급자족하는 경제 경영자였다.

강제 노동 의무가 끝나고 나면, 소작농과 농노로 태어난 그들의 자녀들은 지주의 땅 한 조각을 이용하여 먹고 살기 위한 농작물 몇 근을 수확하려 막대한 비용을 내야했다. 이 영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완전한 문맹이었지만, 지주와 그 자녀들은 아마도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벌어졌다가 또 사라졌다. 교황들은 십자군들이 떼로 와서 무슬림들을 무찔러 줄 것을 촉구했다. 오히려 그들은 무슬림들을 축출하진 못한 가운데 유대인과 다른 기독교 소수 종파들을 포악하게 학살했다.

물론 십자군들은 무슬림과의 접촉을 통해 숫자 체계, 과학, 천문학, 심지어 조선술까지 배우고 진보했다. 이는 유럽의 부와 세력에 가치를 더해줬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아는 유럽의 지식은 바닥을 쳤다. 그들이 아는 종교는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하고, 죄의 용서를 위해 지역 사제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면죄부) 뿐이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는 오래 전 카톨릭 교회에 의해 잊혀졌다.

그때 흑사병이 닥쳐 유럽을 이전과 전혀 다른 곳으로 만들어놓았다. 1346년, 병든 벼룩들이 배에 탄 쥐들에 묻어 선원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흑사병

그때 흑사병이 닥쳐 유럽을 이전과 전혀 다른 곳으로 만들어놓았다. 1346년, 병든 벼룩들이 배에 탄 쥐들에 묻어 선원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이 전염병이 대륙 전체를 강타했다. 접촉 22일만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깊은 구덩이를 팠고, 그것들은 하루면 가득 찼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7년 만에 유럽 인구의 60%였던 5천 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치다. 물론 아무도 그 병의 원인은 몰랐다.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참소가 있었고, 수천 명 단위로 자국민들에게 화형을 당했다.

흑사병으로 임한 유익이 있었을까? 불가피하게 유럽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서구 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여파를 가져왔다. 너무나 많은 농노(와 영주)들이 죽어, 서구 문명의 경제적 질서 자체가 지장이 생겼다. 더 이상 땅을 경작할 일꾼들이 충분치 않았다. 재산의 소유주가 바뀌었다. 많은 소작농들은 수 세기만에 처음으로 이동을 시작했고, 더 나은 조건의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임금이 올랐다. 어떤 이들은 직접 땅을 사서 작은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유럽 경제는 번영과 팽창을 시작했다.

오토만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러 가는 길에 함대를 이끌었다.

또 한 번의 재앙

그런데 또 재앙이 닥쳤다. 비잔틴 제국이 (제국들이 대부분 그런 경향을 갖듯) 자국의 탐욕에 휘둘린 통치자들의 내전과 투쟁으로 내부로부터 함몰된 것이었다. 1453년, 약화된 콘스탄티노플은 오토만투르크에 밀려났고 천 년 간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기독교 제국의 남은 자들에 대해 이 무슬림 제국의 승리가 이번엔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었을까?

서구 기독교 국가의 수백 년 세월 가운데, 주어진 유일한 성경은 라틴어 불가타역(장마다 카톨릭의 혼합 교리가 뒤섞인, 완전히 타락한 번역) 뿐이었다. 서구 학자들은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대한 지식을 통째로 상실한 상태였다.

믿기 어렵지만,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몰락조차 교육의 르네상스가 싹을 틔우는 데에 도움이 됐다. 그로 인해 고전 철학과 문학, 예술의 재발견이 이뤄진 것이다. 그렇다.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를 조장한, 일차적으로 문화 운동이었지만 동시에 프로테스탄트 혁명을 위한 기초를 놓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아무도 일이 어떻게 될지를 예견하는 스크립트를 쓸 수는 없었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헬라어가 널리 사용되었고 학생들은 헬라의 역사와 문학 교육을 받았다. 또한 주로 유대인 가운데, 히브리어 연구도 있었다. 오토만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했을 때, 헬라 학자들은 도망가 그들의 지식을 유럽에 가져갔다. 유럽 학자들의 고대 언어에 대한 관심이 자라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 모두가 부활했다. 그리고 인쇄기가 막 발명되어, 서구 유럽 전역에 교육을 확산시켰다.

루터가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한 바르트부르크의 방. 최초의 원본이 책상 위에 보존되어 있다.

마르틴 루터 (1483~1546)

바로 이 상서로운 시점에, 독일의 종교, 언어, 문화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한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사실 서구 문명 전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1507년에 사제로 임명된 마르틴 루터는 독일인으로서 신학 교수, 작곡가, 사제, 수도사이면서 개혁가였다. 체코의 순교자 얀 후스처럼, 그는 특히 사람을 지옥에서 구해준다며 판매한 면죄부라는 관행을 경멸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그는 구원과 영생이 선행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죄로부터 구속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성경만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지식의 원천이라고 가르치면서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다.

루터의 목적은 독일어를 쓰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주는 것이었으며, 그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부터 번역한 신구약 성경은 1534년에 독일 현지 토착어로 번역되어 종교 개혁을 발진시켰다.

그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은 독일 문화에 가공할 만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 카톨릭 교회를 도전했을 뿐 아니라, 독일어 자체에 기준을 제시하는 데에 일익했다. 그의 찬송가들은 개신교회에서 노래를 발전시키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수녀 출신인 카타리나 폰 보라와의 결혼은 성직자의 결혼이라는 본을 남겨, 개신교 성직자들이 결혼을 허용 받도록 했다.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 성벽 교회 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은 종교 개혁에 불을 붙였다. 카톨릭 교회는 이후 끝없는 분열을 겪었고 이후 등장한 프로테스탄트주의는 루터의 발상들로 구성되었다. 그의 저작들은 서구 종교와 문화 역사의 방향을 틀어놓았다1.

루카스 크라나흐 장로가 그린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1526년 작.

문자를 배우는 사람들

루터의 신약은 인쇄기 덕분에 양복이나 신발을 만드는 이들, 심지어 여성과 무지한 사람들에게까지 너무나 빨리 번졌다. 독일어를 약간 읽을 줄 알던 그들은 새로운 이 루터 복음을 받아들였고, 모든 진리의 샘인 성경을 최대의 갈망을 갖고 연구했다!

당대 교회가 이단이라고 정죄하며 루터의 저작들을 불태워버렸지만, 루터는 사형을 피해 도망쳤는데 평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역 통치자에게 확 “납치”되어 한 성의 은신처로 옮겨졌다. 거기서 그는 성경 전체의 번역에 착수했다. 통틀어서 루터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의 번역을 마치는 데에 10년을 쏟았다.

그가 남긴 선례를 다른 학자들이 이어 받아, 성경을 일상 언어로 널리 읽을 수 있도록 했고 국가 언어가 발달되게 하는 데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2.

하지만 루터는 말년에 성미가 안 좋아진 듯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분노는 그의 인생과 성취들에 지울 수 없는 악의 얼룩을 남겼다. 그의 일생은 우리 모두에게 경고를 준다. 사람이 나라를 변화시키는 데에 하나님께 아무리 강력하게 사용된다 할지라도, 루터에게서 나타난 것과 같은 증오와 분노는 한 민족을 더럽히고 기독교를 독살시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결국 히틀러는 루터의 작품들에서 원조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전 세대를 관통하는 반유대주의라는 독성 종양이 있었다. 루터가 카톨릭 교회의 타락으로부터 상당 부분 떨어져 나올 순 있었지만, 이 커다란 죄를 끊지는 못했다.

윌리엄 틴데일의 초상화(1836)

윌리엄 틴데일 (1494~1536)

잉글랜드 종교 개혁은 독일보다 훨씬 많은 피를 흘렸다. 존 위클리프가 1300년대 말에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영어 성경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사형을 내렸다.

윌리엄 틴데일은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거기는 위클리프가 백 년 앞서 수학한 곳이었다. 신학 학위를 따는 이들이 공부하는 교과서는, 다른 언어가 허락되지 않았기에, 라틴어 불가타 성경이었다.

그러나 캠브리지의 홀들은 이미 루터의 생각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틴데일은 크게 불만을 제기했다.

“그들은 8~9년 동안 이교적 학습을 받고 거짓 원칙들로 무장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성경을 볼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런 교육은 사람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을 깔끔히 차단해버린다.”

윌리엄 틴데일의 불타는 갈망은 성경을 잉글랜드의 모든 평민들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성직자들 가운데에도 성경에 대한 초등 지식이 부족함에 충격을 받은 그는 한 사제에게 말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들에 반항한다.” 윌리엄은 대답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수년이 지나기 전에 내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나는 당신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기 위해 쟁기질을 하는 소년을 돕고 싶다!”

그는 런던에 가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을 수 있을지 주교에게 물었다. 대답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로 떠났다. 물론 그는 존 위클리프가 수십 년 먼저 그런 번역을 해놓았음을 알았지만, 그의 번역은 필사되고 부정확하며, 찾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이 아닌 라틴어 불가타역에서 번역한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함부르크에서 그는 신약의 영어 번역 작업을 했고, 쾰른에서 자신의 작품을 기꺼이 인쇄해 줄 인쇄소를 찾았다. 하지만 틴데일이 신약을 번역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언론이 들이닥쳤다. 틴데일은 이미 인쇄된 장들을 가지고 도망쳐, 보름스의 한 출판사를 찾았다. 6천 부를 인쇄하여 영국으로 몰래 가지고 들어갔다. 캔터베리 주교는 틴데일의 친구로부터 여러 부를 사들여 없애버렸다. 그리고서 그 친구는 틴데일에게 그 돈을 주어, 틴데일은 수정판을 인쇄할 수 있게 됐다!

틴데일은 카톨릭 교회의 격노를 두려워해 마땅했다. 불과 몇 년 전에 여섯 명의 남성과 한 여성이 아이들에게 주기도문과 몇몇 성구를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가르쳤다고 화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헨리 8세와 교황,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그를 찾기 위해 잉글랜드와 유럽 전역을 뒤지는 가운데 틴데일은 앤트워프의 상인들 사이에 숨어서 구약 번역을 시작했다.

빌보르데에서 교살되어 화형되기 전 틴데일은 외쳤다. “주님, 잉글랜드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폭스의 순교사> 목판화 (1563).

진정한 천재

틴데일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을 가지고 직접 작업한 자신의 번역을 라틴어 불가타역과 루터의 최근 독일어역과 비교했다. 그는 독일에서 랍비들 밑에서 수학하면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헬라어는 사실상 독학했다! 그의 번역체는 간결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으며, 평민들에게 익숙한 어휘를 썼다. <브리티쉬 텔레그래프>지는 최근 그의 천재성이 셰익스피어에 비견할 만하다고 전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결국 그는 친구인 척 하던 잉글랜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그 때문에 당국에 넘겨졌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와 복음서에 주어진 자비만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이유로, 이단 재판을 받았다. 그에게 주어진 혐의 중 일부는 이랬다.

  • 믿음으로만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입장을 견지
  • 연옥의 존재를 전혀 부인
  • 성모나 성인들을 불러선 안 된다고 주장

1536년, 틴데일은 정죄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형을 당한 뒤 사체는 화형대에서 불태워졌다. <폭스의 순교사>는 “윌리엄이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몇 마디 유언을 남겼다. ‘주님, 잉글랜드 왕의 눈을 여소서’”라고 기록한다.

1540년 한스 홀바인 (아들)이 그린 헨리.

순교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놀랍게도 바로 그 해, 헨리 8세는 완전히 돌아서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합법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권력이 이제 자신의 것이라고 발표했다. 2년 후, 그는 잉글랜드의 모든 교회에 영어 성경 사본을 교구민들을 위해 제작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에 응하기 위해 영어 대성경(크기 때문에 이렇게 불림)이 제작되게 되었다. 이것은 윌리엄 틴데일이 불법으로 번역했던 판에 기반한 것인데, 죽기 전까지 작업했던 것을 마일스 커버데일이 1535년에 완성했다. 원어 성경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된 최초의 성경이었다. 국왕의 명령으로 즉시 9천 권의 성경이 잉글랜드 전역에 배포되었다.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

다시 카톨릭으로

그러나 헨리 8세의 딸 매리 튜더가 여왕이 된 1553년, 그녀는 잉글랜드를 다시 로마 카톨릭교로 복귀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대성경을 발간한 존 로저스를 포함하여 280명의 프로테스탄트 반대자들을 화형시켰다. 다행히도 그녀가 끼친 피해는 5년 통치로 마무리되었고, 잉글랜드의 카톨릭화에 대한 그녀의 바람도 함께 사라졌다.

1611년, 프로테스탄트인 그녀의 아들 제임스 1세가 47명의 학자들에게 킹 제임스 성경을 제작할 것을 위임했다. 어떤 추정에 따르면 킹 제임스 역의 신약은 틴데일의 번역이 83%, 구약은 76%라고 한다. 2002년, 윌리엄 틴데일은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 100인 중 26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킹 제임스 성경은 현재에도 사상 가장 인기 있는 책으로 남아있다.

http://b.link/martin-luther
http://b.link/martin-luther-2

다음 호: 우리 세대의 성경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