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선고를 받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얀 후스. 화가, 바츨라브 브로지크 (1883)
마 오즈 이스라엘 보고서 1월, 2020

하나님의 말씀을 해방시키기 위한 혈전

종교의 지배를 받았을 때 서구 세계는 암흑기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나타났을 때, 열방은 가장 진보된 문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어섰다. 이번엔 그 이야기를 살펴보자.


read
Maoz Israel
으로 Maoz Israel

(4부)

종교의 지배를 받았을 때 서구 세계는 암흑기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나타났을 때, 열방은 가장 진보된 문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어섰다. 이번엔 그 이야기를 살펴보자.

주후 393년,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교회 가운데 회람되던 많은 사본들을 연구했다. 이들은 예슈아의 원 사도들이 기록한 진본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서들과 확인 불가한 사본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단 27권만이 신약에 포함될 것이었다. 분명 그토록 중대하고 역사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많은 조사와 기도가 있었을 것이다.

신약이 하나의 책으로 공식 완성되기 이전에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50권의 헬라어 성경을 자신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여러 성장하는 교회에 배포하도록 명령했다. 단기간 동안 라틴어와 헬라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로마 황제가 쓰러지고(주후 476년) 교회가 정부를 장악했을 때, 모든 것은 바뀌기 시작했다.

세속지인 <허핑턴 포스트>의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새롭게 세워진 교회가 열성 신자들이 새로 승인된 신약 성경에 몰입하기를 바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교회가 다른 복음서들을 제외시키는 데에 막대한 시간을 쏟았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최선의 방법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대한 직접 접근권을 갖도록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히려 대중들이 스스로 성경 읽게 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성경을 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하는 규정을 추가하여 중세 내내, 그리고 이후에 강화된 정책이었죠.”

1847년에 인쇄된 구텐베르크 성경. 미국인이 손에 넣은 최초의 사본이었다.

문맹에 빠져들다

다른 사건들은 의도치 않게 기독교계를 위한 성경 필사를 늦추었다. 로마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두 제국으로 갈라졌다. 로마의 전복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라틴어는 사그라져 많은 유럽 현지어들로 대체되었다. 비잔틴 제국으로 알려진 동쪽에서는, 헬라어가 귀족들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대중들이 쓰는 다른 많은 현지 언어가 있었다.

성경은 계속해서 라틴어와 헬라어로 필사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둘 다 읽을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볼 때, 고도의 교육을 받은 부자들만 글을 읽을 줄 알았다.

수 세기를 거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수도자들 가운데에도 학교 교육의 필요성을 알리지 않았다. 이는 교육 받은 종교 학자들의 부족이 있었다는 의미다.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이 수도자들은 라틴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했음에도 라틴어로 성경을 필사하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기독교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테르툴리아누스와 이후 위클리프 같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모두 수도사가 되기 전에 대학교에서 고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이 현대에 교훈을 주는 이유는 오늘날의 대학교들이 대부분 하나님을 부인하는 교수, 정치가, 지성인들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결과가 선하든 악하든, 중요하다.)

독일의 어느 대학교 수업. 이탈리아 화가, 라우렌추스 데 볼톨리나 (1350년대)

부자만을 위한 교육

암흑기의 가장 캄캄한 기간에는 빈민을 위한 학교가 없었다. 하지만 많은 도시와 마을들에 부자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은 있었다.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는 주후 900년 이전에 대학교로 발전했다. 1320년에만도 옥스포드에는 3만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에 대학교가 존재했고 모두 라틴어로 수업을 했다.

중세 후반에 이르러, 종교와 세속 문서의 생산이 전문 필사자들에게 넘겨졌다. 도서 판매자들은 대학교와 성당, 학교 근처에 가게를 열었고, 도서 거래는 꽃을 피우게 됐다. 물론 중세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놀라운 일러스트레이션이 가득한 그림 성경이 인기가 높아졌다.

거대한 사이즈 때문에 성경 완본은 여러 권으로 나뉘어졌고 각 권은 값이 많이 나갔다. 부유한 성당과 대학교들만 그 가격을 감당할 수 있었다.

가독률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이 극도로 고가였기 때문에, 카톨릭 당국은 교구민들이 성경을 직접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안일한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박탈이 이후 법이 되었다.

양떼를 굶기다

그렇게 천 년 동안 로마 카톨릭 당국은, 교황과 그들의 공의회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책임 하에 있는 양떼로부터 강제로 빼앗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역사적 행동을 정죄하는) 로마 카톨릭은 유대 지도자들의 행동(통제와 부패)이 단순히 인간 본성임을 증명해주었다. 로마 카톨릭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난 시절 유대 지도자들을 비난했던 바로 그 죄를 똑같이 저지르고 있었다.

수 세기가 지나면서, 유럽 주민들과 교회가 다스리는 모든 곳에 대한 지배와 통제는 더욱 극단화되었다. 성경을 현지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학자로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칼에) 목숨을 빼앗길 수 있는 범죄가 되었다.

뚤루스 공의회 칙령 (주후 1229): “우리는 평신도가 구약 혹은 신약을 소지하는 것 또한 금한다. 나아가 이 중 어떠한 번역본이라도 소지하는 것을 가장 강력히 금한다.”

주후 1234년 따라고나 공의회 판결: “누구도 로망스어군으로 된 구약과 신약 책을 소유할 수 없으며, 소유한 자는 이 칙령 공포로부터 8일 이내에 지역 주교에게 제출하여 소각시키도록 해야 한다…”

“이단”을 제거하기 위한 당국의 엄격한 규제로 인해 시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박탈 당하고, 주민들의 모국어로 성경 번역이 금지된 가운데 죄가 교회를 장악했는데 그 시작은 지도자들이었고 끝은 기독교계였다.

용기 있는 목소리가 나오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자 하는 지하의 감동과 갈망은 늘 있었다. 성경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번역가들은 교회에 붙잡혀 이단으로 처벌 받았다. 10세기에도 끝까지 이름을 감춘 한 성경 학자가 용감하게 복음서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기독교계 전역에서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는 사적으로 회람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유럽 다른 국가들의 그 외 인물들이 비밀스럽게 성경의 일부를 번역하려 시도했다. 피터 발도는 프랑스에서 번역을 의뢰했다가 교회로부터 1184년에 파문되었다.

발도파라고 하는 그의 추종자들은 유럽 전역에 가지를 쳐서, 성경을 대중들에게 전하려는 지하 캠페인을 일으켰다. 수 세기 동안 교회는 성경의 전파와 배포를 중단시키려는, 끝없는 심문(종교 재판)을 진행했다. 이 그룹은 17세기에 거의 전멸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독일로 피신했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이 국가의 사람들은 13, 14세기에 함께 모여 자국어 성경 완본을 요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유럽 토착어들이 이제 충분한 유동성, 정밀성, 단어 선택의 폭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대중들의 모국어로 성경의 위대하고 기념할 만한 번역본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16세기 존 위클리프의 초상화. 작자 미상.

존 위클리프 (1328~1384)

그리고 무대에 등장한 것이 존 위클리프라는 위대한 혁명가였다. 그의 핵심 교리는 이랬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 책을 공부해야 한다. 이것이 진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교 출신의 교수이자 신학자로, 신약을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었다. 그 목적은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언어로 복음서를 공부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는 위클리프를 정죄했지만, 옥스포드 대학교는 그가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해주었다. 또한 그는 제도권 교회의 힘과 부를 맹렬히 비난하며 옥스포드의 아주 인기 있는 리더가 되었다. 저명한 신학자로서 그는 교황과의 협상 가운데 의회에 자문을 전하기 위해 불려갔다. 당시는 교회가 전능한 세상이었는데, 로마와 많이 접촉할수록 위클리프는 분개했다. 교황은 부패와 사리사욕으로 악취가 났고 그는 그것에 대해 뭔가를 하기로 결심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확고히 믿었다. 그는 빈민들을 해방시킬 열쇠는 문맹 탈출이라고 보았다. 라틴어를 말하거나 읽지 못한 평민들은 성직자들을 통해서만 믿음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들은 분명 속셈이 있었다.

교황의 압박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는 캔터베리의 대주교로부터 정죄를 받았고 옥스포드에서 해고되었다. 하지만 교황보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그의 확신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성경 전체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이어갔고, 그로부터 3년 후에 사망하긴 했지만, 그의 학자 그룹이 1395년에 성경 전체를 완성했다. 성경을 숨기려는 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기회를 맞고 있었다.

이 “이단” 위클리프는 캔터베리 대주교인 아룬델에게 사후에 정죄를 받았다. 공의회의 칙령으로 “위클리프의 유골은 파헤쳐져 공개적으로 소각되었고, 그 재는 스위프트 강에 던져졌다.”

16세기 얀 후스. 작자 미상

얀 후스 (1372~1415)

동시대에 유럽의 여러 지역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른 교육 받은 사람들을 일으키사 사람들이 성경을 자기 언어로 받게 될 것을 요구하게 하셨다. 그들은 이 일에 목숨을 걸었다.

얀 후스는 체코 프라하 대학교 출신의 신학자였다. 그는 존 위클리프를 잇는 제2의 교회 개혁가로 여겨진다. 그는 보헤미아에서 안수를 받고 설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겪은 커다란 변화는 성경을 발견했을 때 일어났다. 그는 “주님께서 성경의 지식을 주셨을 때” 멍청함과 어리석음을 버렸다고 증언했다.

존 위클리프의 저작들은 성경에 대한 그의 관심을 동요케 했다. 그는 성경에 더 많은 방점을 찍고 싶었다. 개혁가가 된 그는 지역 교회 공의회의 권위를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교황의 권위를 축소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성직자들의 도덕적 부패를 척결하는 일에 동기 부여를 받았다. 그는 “숨을 쉬는 한 성경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을 붙들고 믿고, 주장하기를 갈망하며” 그러한 생각들이 성경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한편 선출된 세 명의 교황들이 모두 자신이 적법한 교황이라고 주장했다. 셋 중 한 명은 후스를 파문시키고 그의 설교를 금지시켰다. 교황이 재고를 채우기 위해 매매한 저주받은 면죄부 등 교황청의 철저한 도덕적 타락을 목격한 후스는 성경이 교회의 최종 권위라고 선포하며 이전보다 더 강하게 성경에 의지했다.

그는 2년 동안 수많은 논문을 열렬히 저술했는데, 그 중 하나의 제목이 “교회”다. 그 논문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만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그리고 죄를 범하는 교황에 반역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것이다.”

1414년 11월, 콘스탄츠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후스는 캥거루 재판에 처해져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전능하시며 전적으로 정의로우신 유일한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께 호소한다. 거짓 증인들과 그릇된 공의회가 아니라, 진리와 정의에 기초하여 내 뜻을 그분 손에 탄원한다.”

그는 1415년 화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재는 “이단”의 흔적이 전혀 남지 못하도록 호수에 던져졌다. 그 재 가운데 강력한 성경 기반의 운동이 피어났는데, 그것이 모라비아 형제회다. 그들은 전 세계에 수백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웨슬레 형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회심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사실 모라비아 선교는 개신교 선교에 있어 최초의 대규모 운동이었으며 현재까지도 하나의 교단으로 남아있다.

작동 중인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보여주는 목재 조각 스케치

구텐베르크 인쇄 (1450)

때가 찼을 때, 성경이 기록된 이래 하나님의 말씀을 확산시키기 위한 최고의 도구가 발명되었다. 분명 이것은 하늘의 천사들이 기다려온 선물이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1450년에 작동을 시작했다. 4년도 되지 않아 첫 성경이 인쇄되었다. 다름 아닌 라틴어 불가타 로마 카톨릭 성경이었다. 여전히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부유한 귀족들 뿐이었기에, 그리고 불가타역이 널리 알려져 있는 유일한 성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전 인류에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를 제시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의 갱신을 일으키는 촉매제였고, 교육의 진보와 전례 없는 번영을 가져왔다.

인쇄기는 금세 카톨릭 교회의 원수가 되었다. 곧 성경이 교회가 불태우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인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 내에서, 그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성경이 그 본래 소유권자들에 대해 갇혀 있게 했던 쇠사슬을 천천히 끊어내는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언어권에서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한 전쟁은 끝나려면 먼 상황이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은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 2월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