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방패가 아니라 인간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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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24년 10월 1일 |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

하마스가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수년 동안 여러 미디어 플랫폼에서 논의하는 것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이 민간인 거주 지역, 병원, 모스크, 심지어 학교와 유치원에 위치한 테러리스트 군사 표적을 제거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 서구 세계가 이해하도록 돕는 데 사용되었다.

'인간 방패'라는 표현은 무고한 민간인을 테러리스트들이 자신이나 무기를 보호하기 위해 그들 사이에 배치하는 전략을 가리킨다. 누군가 자신에게 총격을 가하면 '무고한 사람들'이 사망하여 국제적인 소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들에게 이 전략은 윈윈이다. 반면에 이스라엘군이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임무를 중단하더라도 테러리스트와 그들의 재산은 안전하게 유지된다.

그러나 진실을 전체적으로 보면 실제로 훨씬 더 잔인하다.

10월 7일 공격 이후 갈릴리 지역의 드루즈 족이 군인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하마스 땅굴망을 찾기 위해 IDF가 폭격한 건물 잔해 속에서 가자 주민들을 찾아내며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지하 기동성을 제공하는 땅굴은 방공호의 역할도 하지만, 테러리스트들만 접근이 가능하다.

필패

1948년 이스라엘이 가장 작고 가장 약한 국가였을 때에도 이웃 나라 5개국이 이스라엘을 동시에 공격했지만 파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랍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가진 기적적인 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1948년의 전설적인 전쟁 이후, 주변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섬멸하고, 이슬람의 거점 한가운데서 경배받으시는 낯선 유대 민족의 신의 흠을 없애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해 왔다. 모든 공격은 결국 어떠한 결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이십여 년이 걸렸지만 1960년대에는 이스라엘의 적들의 사고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중동에 거주하는 수천만 명의 무슬림(최대 수억 명)이 당시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약 300만 명의 이스라엘인을 정복하지 못한 것은 씁쓸한 현실이었다.

전략 변경

하지만 군사력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적들은 수년 동안 서구 문화를 연구했다. 그들은 서구가 인간의 삶에 대해 확실히 감정적이라 쉽게 주무를 수 있다는 결론을 기꺼이 내렸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동맹국들을 떼어내려는 전략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고립시키면 이 작은 나라가 국제 협력을 바탕으로 번창하는 세계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서구를 이용해 이스라엘을 짓밟으려 했다.

인간 제사라는 방법으로.

우리가 알듯, 인간 방패의 사용은 나쁜 놈들이 공격 받는 것을 막고자 함이다.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고 범죄를 저질러도 벗어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의도가 과정 중에 인간 방패가 죽도록 하려는 것이라면…

그들은 인간방패가 아니다.

인간 제물이다.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자.

보호 및 방어

   

이스라엘은 존재 초기부터 이웃 국가들의 장기적 위협을 깨닫고 자국 민간인을 보호하려는 조처를 했다. 법으로 모든 아파트, 주택 또는 사업체는 국민들이 로켓 공격을 받을 때 갈 수 있는 지정 강화 공간을 마련하여 건축해야 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또한 사이렌이 울릴 때 별도의 폭탄 대피소가 없거나, 오래된 구조물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공 방공호를 건설했다.

반면,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은 수십 년 동안 가자지구에 방공호를 건설할 계획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

가자지구 주민들을 돕기 위해 매년 가자지구에 지원되는 수십억 달러의 인도주의적 자금은 이스라엘(그리고 결국 서방)을 전멸시키려는 대의에 헌신한 테러리스트들만 접근할 수 있는 지하 터널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 민간인은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터널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남부의 이 놀이터는 양쪽 끝에 방공호가 설치되어, 밖에서 놀던 가족들이 사이렌만 울리면 대피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이슬람 테러는 적의 희생자들의 죽음뿐 아니라 자국민들의 죽음을 통해 번창한다. 하마스에 있어 가자 민간 주민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단순한 방패가 아니라 그들의 대의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던지기 위해 고안된 무기였다. 알라의 영광을 위한 희생인 것이다.

이것이 하마스가 가자지구로 반입된 인도주의 물품을 훔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 희생 제물로 지정된 민간인에게 그런 것을 낭비하겠는가? 그리고 지금 어찌저찌 살아남은 민간인은 서구와의 후속 전쟁에서 제물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학교에 시간과 돈을 투자했고, 사실상 모든 주민 전체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도록 세뇌했다. (어느 중동 국가도 팔레스타인 난민을 기꺼이 수용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현지국의 통치를 이어받아야 하는 기생적인 필요성이다.)

죽음은 그들의 예배 형태다. "순교한"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어머니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마스에 방공호 건설을 요구하지 않고 수년 동안 가자 주민들의 침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자지구에서 국제 사회에 대피실을 제공해 달라고 간청하는 외침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팔레스타인의 복지를 책임지는 유엔기구인 UNWRA에서 테러리스트들이 학교를 무기 저장과 터널 부두 입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가자지구에서 싸우는데 폭발물이 내장된 채 학교가 부비트랩으로 지어졌다고 증언하는 IDF 병사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또 들어가는 모든 집에 예외 없이 어린이 장난감과 살인 방법을 가르치는 책이 있었다고 증언하는데 말이다.

이스라엘에서 테러 공격이 성공하자 가자 어린이들에게 거리에서 간식을 나눠주고 있다.

더욱 최근으로 관련성이 높은 경우를 보자면, 이스라엘이 수백 명의 인질을 잡으러 올 때 숨을 곳이 없을 것을 알면서 기쁨의 함성으로 환호하고 10월 7일의 공격을 축하하는 과자를 나눠주는 가자 주민들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마스와 아무 관련이 없이 살려는 가자 주민들도 있겠지만, 이 시점에서 볼 때 그들의 시위는 너무 늦게 시작되었다. 집을 떠나 대피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마스의 봉쇄 조치로 귀가 명령을 받았거나 길가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하마스 입장에서는 IDF가 동네 아래 땅굴을 파헤치는 것을 막거나, 땅굴에서 테러리스트를 찾으려 할 때 그들이 집에 있어야 했다. 전략적으로 가자 주민들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하마스에 아무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마스는 이들을 이용해 서구에 죽은 가자 주민들의 사진을 제공하며 이스라엘을 비난한 것이다.

생각의 전장

이러한 인간 제물 전략에 맞서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전략은 다층적이며, 국내외적으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요구된다.

IDF가 한 지역에 임박한 공격을 경고하는 전단을 떨어뜨리는 사전 경고 기술과 옥상에 떨어뜨리는 '똑똑이' 폭탄으로 약간의 폭발을 일으켜 민간인(및 테러리스트)이 목표 건물을 무너뜨리기 전에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IDF는 생포된 테러리스트에게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윤리적 관행을 뛰어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도 인플루언서들은 생존을 위한 이스라엘의 싸움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더 많다.

최근 영국의 전 나토군 최고 연합 사령관이었던 존 맥콜 경은 다른 전직 나토군 장교들과 함께 이스라엘에 도착해 진상 조사를 벌였다. 맥콜은 이스라엘에 불리한 입장을 취했었다고 인정했다. 영국군보다 IDF 정책이 훨씬 더 윤리적으로 바로 서 있다고 선언하며,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설명하면서 그의 반응은 더욱 의미가 커졌다.

몇 년 전, 이스라엘이 수배 중인 가자지구의 테러리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집을 떠나라고 명령한 사건이 있었다. 이 테러리스트는 이웃과 친구들, 즉 모든 테러 지원자들을 불러 결국 이스라엘이 임무를 중단할 때까지 지붕 위에 서 있으라고 요청했다.

엄밀히 말하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면 이번 라운드에서 승리했을 것이지만,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이 공격했다면 더 큰 승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집 한 채 비용과 수백 명의 가자 주민이 사망한 것만으로도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UN 결의안, 국제적 비난, 새로운 보이콧, 하마스의 주권 국가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병

명예이자 비밀 무기, 심지어 갈망하는 결과로서의 죽음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어린 시절부터 무슬림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심어진다.

2000년대 초, 제2차 인티파다('봉기'를 뜻하는 아랍어)로 이스라엘인 1,000명 이상이 살해당했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난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유대와 사마리아)에서 팔레스타인 아랍 어린이들이 UNWRA의 감독하에 세뇌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 TV 프로그램에서는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이 어린이들에게 질문하는 장면이 나왔다.

“더 크면 뭐가 되고 싶니?”

“순교자요!” 아이들이 남녀 없이 대답했다.

“우릴 억압하는 원수가 누구지?”

“유대인들이요!”

“‘너희의 고토 팔레스타인'을 위해 무엇을 기꺼이 바치겠니?”

“피요!”

이 폭로 다큐멘터리의 내레이터는 경고했다. “몇십 년만 지나면, 순교자의 시대가 올 것이다…그 시대에는 지금의 인티파다가 아이들 장난처럼 보일 것이다.”

'인티파다'가 9/11 테러를 통해 미국 땅에 도착하는 데는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군대를 중동 깊숙한 곳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빠뜨렸다. 이것은 20년 전의 일이며,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공격을 자행한 많은 최초의 테러리스트들은 이미 숨졌지만,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렬하고 많은 숫자로 살아나고 있다.

왜 그럴까? 인간 제물을 연료로 삼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들은 더 많이 죽일수록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더 많이 죽을수록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더 많은 죽음과 더 많은 권력을 가질수록 알라를 기쁘게 하고 그들이 탐내는 세계 지배에 더 가까워졌다.

팔레스타인 아버지가 이스라엘 군인을 향해 아들을 밀치며 "쏴 죽여!"라고 소리치면서 아이에게 가라고 명령합니다. 죽여버려!"라고 군인들에게 소리칩니다. 대신 군인은 소년에게 손을 내밀며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유튜브)

생명보다 죽음이라는 이슬람의 원칙이 선포된 많은 사례 중 하나로, 역사적으로 이슬람의 대의에 동조해 온 BBC조차도 시리아에서 '이슬람 국가의 전사'를 인터뷰했을 때는 냉담했다.

"우리는 당신들을 향해 간다." 그는 불안할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갈 것이다."

모든 무릎이 꿇게 될 것?

"하지만 모든 무슬림이 나쁜 것은 아니며, 많은 무슬림이 평화를 추구한다."라는 말은 미디어 토론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사다. 서구인, 특히 긍휼을 중시하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맞선 심리전에 가장 취약하다. "이슬람"이라는 단어는 복종을 의미한다. 이슬람에 '복종'하고 싶지 않다면, 적이자 이교도가 될 수밖에 없으며, 전쟁 선포의 대상인 것이다.

평화적인 무슬림이 있다는 말은 생뚱맞은 소리다. 10월 7일의 사건이 증명해 준 바가 있다면, 평화적인 무슬림은 비무슬림만큼이나 빨리 총에 맞고 고문당하고, 납치당한다는 것이다. 중립 선언은 굶주린 사자 무리 가운데 살려주기를 바라며 무기를 내려놓는 것과 같다. 하마스는 우리에게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으며, 포식자 대열에 합류해야만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고 본다.

지금과 같은 자유를 계속 누리고 싶다면, 서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의사가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제기된 정치적/사회적/지리적 문제는 주로 대중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테러리스트들이 지하 요새를 건설하고 무기 저장고를 늘리는 동안 위장을 하는 활동가를 모집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지루할 수 있고, 선전은 감정에 호소한다

적은 여론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실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를 털기만 하면 된다. 이야기가 극적일수록 사람들의 감정이 논리를 압도할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인 예가 전쟁 초기에 폭격을 당한 가자의 알아흘리 병원의 상황이다. 폭발 후 몇 분 만에 가자 보건부는 이스라엘의 발포로 500명의 가자 주민이 사망했다고 선언했다. 논리적으로 500명의 시신을 잔해에 쌓아두기는커녕 일렬로 배치해도 도저히 셀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아무런 사진이나 증거 없이 재빠르게 수치를 보도했다.

로켓이 이스라엘의 것이 아니라 이슬람 지하드의 발사 실패 때문이었고, 실제로는 병원 근처 주차장에서 차량 몇 대만 맞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더 이상 이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물론 500명으로 추정되는 모든 사상자를 위한 대규모 장례식 준비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이야기는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현재까지도 병원 폭탄 테러에 대해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최초 게시물들을 찾을 수 있다.

더 큰 시각적 예는 대량 학살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비난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스스로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보호 본성을 드러내는 정서적 용어다. 짧게 답하자면 이스라엘에는 유대인의 모든 권리와 특권을 똑같이 가진 수백만 명의 아랍 국민이 있지만 가자지구에 있는 극소수의 유대인들이 땅굴에 갇혀 있다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아파르트헤이트일까?

또한 이스라엘이 실제로 다른 중동, 극동, 그리고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처럼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 싶었다면 이스라엘 군인들을 보내 관련 없는 가자 주민들과 테러리스트들을 걸러내어 분리함으로써 이스라엘 군인들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공습을 통해 가자지구 전체를 무너뜨렸을 것이다.

분별

우리도 이해가 된다.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사기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선량하고 괜찮은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들도 선량할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는 악의가 아닌 선을 갈망하기 때문에 테러리스트의 뒤틀린 속임수에 가장 취약하다.

식인 문화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면, 그곳에서 살면 어떨지 이해하는 데 꽤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문화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명'이 있는 서구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유대 민족과 그들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사람을 멸절하기 위한 무기로 자신들의 파괴를 설계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봐야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단순히 인간 방패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무장 이슬람 세계가 바치는 인간 제물이다. 즉, 이스라엘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말이 들려와도, 인간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이스라엘과 최고의 동맹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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