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된 다이아몬드
군대에서 일어나는 일들 대부분은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IDF는 이스라엘 사회 가운데 가장 독특한 섹터다.
인류가 이렇게 독특하게 섞인 가운데 이스라엘엔 수만 명의 외로운 군인들이 있다. 외로운 군인들은 반드시 고아인 경우만은 아니다. 이들이 “외롭다"는 범주에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 가족이 없어 군대 밖에 지원 시스템이 전혀 안 갖춰진 경우다. 이 군인들은 IDF로부터 특별 혜택을 받는데, 풀타임으로 국가를 위해 복무하면서 휴가 때엔 전적으로 “민간인의" 삶을 돌봐야 한다는 어려움을 완화해주기 위한 목적이다.
군대에서 일어나는 일들 대부분은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IDF는 이스라엘 사회 가운데 가장 독특한 섹터다. 이스라엘 민간인들 대부분이 거쳐가는 곳이고 복무를 통해 인생 중 몇 년을 바치기 때문에, 군대가 아니었으면 스치지도 않았을 많은 유형의 사람들이 한 부대에 배치된다. 외로운 군인들로부터 장애인, 제한적인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유대교인들에 이르기까지, IDF는 기회와 운명의 독특한 허브가 된다.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공개하기에 적합한 수위 안에서 조금 나눠본다.
혼자 덤벼들다 – 노암*
인류가 이렇게 독특하게 섞인 가운데 이스라엘엔 수만 명의 외로운 군인들이 있다. 외로운 군인들은 반드시 고아인 경우만은 아니다. 이들이 “외롭다”는 범주에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 가족이 없어 군대 밖에 지원 시스템이 전혀 안 갖춰진 경우다. 이 군인들은 IDF로부터 특별 혜택을 받는데, 풀타임으로 국가를 위해 복무하면서 휴가 때엔 전적으로 “민간인의” 삶을 돌봐야 한다는 어려움을 완화해주기 위한 목적이다.
우리 역사 선생님이 키부츠에서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된 일곱 명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마음에 씨가 심겼다. IDF에 입대한다면 나는 전투 부대로 들어갈 것이었다. 당시는 고등학생이었다. 정확히는 기숙 학교에 살고 있었다. 나는 15세에 이스라엘로 홀로 이주했다. 가족도 없이 새로운 나라에서 살아가는 둘째 해였기에, 오랜 역사를 품은 나의 고토에 대한 깊은 애착심을 꺾는 것은 없었다.
18세가 되었을 때 나는 졸업을 하고 공식적으로 알리야를 했다. 이스라엘은 보통 신규 이민자들에게 정착할 수 있도록 몇 년의 기간을 준 뒤 징병을 한다. 그러나 나는 기다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의 도움을 받아 IDF에 당장 입대할 준비가 되었다는 서신을 보냈다. 나는 미국의 해병대에 해당하는 기바티 부대에 배치 받았다. 나는 국내에 가족이 없었기에 외로운 군인으로 분류되었다.
이스라엘에서 기숙 학교에 다니며, 나는 전 세계 곳곳에서 온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공부했다. 하지만 훈련소에 도착했을 때 내가 경험하게 된 다양성과 같은 것은 본 적도 없었다. 모로코, 에티오피아, 예멘에서 온 이스라엘인들이 있었다. 또한 드루즈족과 이스라엘의 동맹이 되기로 한 레바논 가족 출신도 있었다. 우리가 모두 한 팀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문화적으로는 전혀 동떨어진 세계에 속해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이스라엘 경험은 불과 2년 밖에 안 된 반면, 그들은 거의 평생을 이 땅에서 살았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떠나온 땅의 문화의 한 조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반에 나는 연습이 꽤 쉽다고 생각했다. 달리기, 등산, 포복, 팔굽혀 펴기 그리고 일찍 일어나서 그 모든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사막에 던져졌고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극도로 힘든 훈련이었고 나는 몇 번이고 뭘 하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함께 극복하면서 우리는 형제처럼 끈끈하게 연결되었다.
그래도 나는 그들과 달랐다. 외로운 군인이기 때문이었다. 주말이면 그들은 가족들과 깨끗한 옷이 가득한 옷장, 그리고 따뜻한 음식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반면 나는 월세를 내는 텅빈 원룸으로 가서 홀로 밥을 해먹고, 빨래도 청소도 하고, 그 다음 2~3주를 위한 짐을 쌌다. 생활 방식의 극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나는 다른 삶을 몰랐기 때문에 내가 뭘 놓치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무단이탈로 처벌 받았을 때만 삶의 차이를 느꼈다. 나는 현금으로 핸드폰 요금을 내기 위해 허가 없이 부대를 떠났던 것이었다. 내 번호에 충전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외부에 전혀 없었는데 은행에서 내 계좌를 차단시킬까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나는 집에 돌아갔을 때 음식을 사먹을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었다.
이 사건은 내 친구들이 내가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를 다시 보게 했다. 그들은 내 빨래를 가지고 갔고, 집에서 돌아올 때면 온갖 먹을 거리를 갖다 주었다. 그들은 내가 문제를 일으키려고 도망갔던 게 아님을 알았기에 내가 부대에 40일 동안 갇혀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했다. 나는 도움에 고마운 마음이었고 동료들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대신 주말에 부대에 남았다. 어쨌든 그들에겐 집에 갈 만한 중요한 일들이 있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외로운 군인이라는 것은 매일의 일상을 홀로 견뎌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내가 완전히 혼자라는 뜻은 아니다. 이스라엘인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셔야 한다는 필요는 비유적인 게 아니다. 우리는 지속적인 위협 하에 있으며 정말로 주님의 보호하심이 필요하다. 전쟁터에 있을 때는 더욱 그런데, 정말 우리보다 앞서 가사 대신 싸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충돌이 벌어졌을 때 우리는 고급 훈련 기간 중이라 가자에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겨우 훈련 8개월 째의 신참이었기에 사령관들은 부상자들 치료를 위해 우리를 보냈다. 위험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대면하여 보게 되었다. ‘던져진 납’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우리는 처음 투입된 인력이었다.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애매한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은 민간인 사상자 발생을 막기 위해 무딘 애를 쓴다는 것을 알고 고의로 주거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한 지상 작전 중에 우리는 버려진 한 주택가에 들어가서 학교 건물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버려진 것은 수일 전에 전화와 팜플렛을 통해 민간인들에게 하마스 본거지에서 빠져나오라고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우리 군인 두 명 가량이 학교 밑을 가로질러 설치된 선을 발견했다. 그 선을 따라가보니 근방의 동물원이 나왔고, 그것이 기폭 장치와 연결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기폭 장치 옆에는 매트리스, 몇 장의 이불, 옷가지 그리고 먹을 거리가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얼마 전에 군인들이 자던 학교를 폭파시킬 목적으로 거기 왔었던 것이었다. 이후 조사를 해보니 학교 전체에 건축 때부터 부비 트랩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것은 하마스 투사들이 생각도 못한 이스라엘 소대 머리 위에 고층 건물을 무너뜨릴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가자 어린이들은 폭발물이 설치된 학교에 꾸준히 다녀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이유였다. 이스라엘이 말 그대로 그 지역에 올 것이라고 발표를 했는데 폭파 버튼을 누르기로 한 자가 누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군 수백 명을 순식간에 날려 버릴 임무를 그 테러리스트가 수행하지 못하게 하셨을 것을 확신한다.
*모든 이름은 보안상 가명 처리

숨겨진 보물 – 야니브
특수 요구(장애) 인원들 가운데서 숨겨진 보물을 인식하는 IDF의 능력은 다른 더 크고 부유한 나라들보다 우위를 점하게 했다. 대표적인 예로 이스라엘의 9900 부대는 완전히 자폐증 환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이버 전쟁에서의 즉각적인 사고와 다른 사람들 및 기계들이 놓칠 수 있는 감시 상황을 감지하는 데 매우 유용함이 입증되었습니다.
야니브는 뇌성마비와 청각 장애가 있다. 이스라엘에서 육체적 한계를 가지고 양질의 일자리를 찾는 것은 좋게 말해 어려운 일이다. 그런 상황을 극복하고 그는 공군에서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재능으로 훌륭하게 국가에 기여하게 됐다.
이는 이스라엘군이 야니브를 모든 이스라엘인이 이행해야 할 의무에서 “심각한 신체적 장애로 인한” 면제 기준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야니브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봉사하기를 원했다. 무조건 자원하여 복무하겠다는 서신을 보내자, IDF는 무엇보다도 행정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은 그를 테스트하기 위해 받아들였다.
비록 장애가 그에게 특정한 특권을 부여해 주었을지라도, 그는 오래 일하고 부대에서 자는 등 최대한 다른 군인들과 같이 살기를 고집했다. 야니브는 “공군은 비행 후 및 작전 데이터 분석을 담당하도록 훈련했을 뿐만 아니라 조사 결과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신뢰를 보내주었다”고 설명했다. 이 일을 터득한 야니브는 자신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상관들도 동의했다. 그들은 함께 야니브가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병사들을 위한 장교 훈련 과정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현재 야니브는 장교로서 다른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한계 사항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것은 야니브만이 아니다. 섬기려는 마음만 있으면, 각 병사를 맞는 기술로 발전시킬 수 있는 뼈대가 IDF에는 잘 설계되어 있다. 삶의 방향을 바꿔준 편대에 대한 야니브의 감사는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성벽 파수꾼” 작전이 진행됐을 때, 야니브는 사관학교에서 낮 근무를 마치고 공군 기지에서 편대와 함께 야간 봉사를 했다.

섬기는 자유 – 베냐민
초정통파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군대는 금지된 장소이다. 종교 정당들은 자국민들을 세속 세계에 노출시킬 의무 복무로부터 종교계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가리고 군복무를 선택했던 사람들은 종종 군대에서의 시간이 그들의 종교적 관행에 반드시 적대적이지는 않은 방식으로 펼쳐지는, 환대 받는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토라를 공부했지만 중학교 때 나는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싫어서 결심했다. 내가 믿는 바를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다. 엄마는 내가 토라를 떠나기로 한 결정에 매우 불만스러워했고 우리는 거의 매일 그것 때문에 싸웠다. 아버지는 사업이 어려워 내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내 공부를 덜 문제 삼았다.
집안 사정이 너무 안 좋아서 직장에서 잠을 자주 잤다. 사업이 힘들어질수록 아버지는 우리 모두에게 더 가혹하게 굴었다. 결국 파산했고 우리는 집을 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은 이혼했다. 아버지는 출국하여 여자친구를 구했고, 버려진 어머니는 동생들을 혼자 키우셨다.
나와 같은 초정통파 유대교 가정은 보통 군복무와 무관하지만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IDF에서 원하는 트랙에 들어갈 수 있는 군대 준비 과정을 찾았다. 처음에는 내가 기댈 데가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일해야 할 것이었다.
결국, 내가 알고 있던 예루살렘에서의 모든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일을 찾아 도망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에 집을 떠났고, 가족들은 군대에 가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일단 입대를 했더니 외로운 군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나는 결국 공군 기술자로서 훈련을 마쳤다. 비행기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걸 보면 우리 지상의 기술자들이 저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안다. 평생을 이 땅에서 살았지만, 이스라엘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에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