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오즈 이스라엘 보고서 February 2021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선택

자라면서 유대인이라는 것은 제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을 굳건히 믿었던 게 아니라, 수 세대를 걸쳐온, 우리의 혈통과 전통을 중요한 보물로 아끼고 전해야 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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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ni Ferguson
으로 Shani Ferguson

자라면서 유대인이라는 것은 제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을 굳건히 믿었던 게 아니라, 수 세대를 걸쳐온, 우리의 혈통과 전통을 중요한 보물로 아끼고 전해야 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던 순간이 평생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을 보면, 저는 하나님과 연결되고 싶다는 강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동네 회당을 다녔는데, 부모님이나 그곳 랍비나 저에게 그런 쪽으로 도움을 주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힘으로 최선을 다했죠. 저는 침대 곁에 서서 셰마(들으라 이스라엘)를 외고, 예루살렘 방향으로 회당에서 배운 기도문을 암송하곤 했습니다. 그 다음엔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지 여쭤보고, 매일 응답이 있기를 기다렸죠.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보다, 그분이 누구신지를 정의내리는 것은 훨씬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한참 전에 두 가지 의미 있는 사건들로 예슈아와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 생기게 됐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자녀들을 탁월한 교육으로 유명한 사립 카톨릭 학교에 보내는 흥미로운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저는 그곳에 4년을 다녔습니다. 저희는 분명 수업 시간에 수학, 과학, 역사 등 기본 과목에 집중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나 예슈아에 관한 모든 것은 완전히 무시하라고 배웠죠. 저는 그 말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예슈아에 대한 이야기가 카톨릭 맥락 가운데 이뤄지긴 했지만, 그 주제를 무시하라는 지시는 더 많은 호기심과 질문을 자아낼 뿐이었습니다. 5학년 때 부모님은 저를 더 유대인이 많이 있는 학교로 전학시키셨는데, 질문들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 시간 가운데 알지 못했지만, 저희 가족 중에 저만 그 질문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개혁파 유대교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어머니도 동양 철학을 탐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친척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그분이 어머니에 대한 생생하고 짜릿한 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꿈이 정말 어머니의 인생에 대한 관점을 바꿔놓았고, 그날 즉시로 어머니는 예슈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체험하신 바를 저에게 나눠주셨을 때 저는 12살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것은 저라는 사람에게 너무나 중요한 정체성이었기 때문에 제가 그 내용을 소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진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 속에서 느껴졌습니다.

바르 미쯔바 전에 가족들과 함께 토라를 들고 있는 에반

바르 미쯔바 때가 됐을 때 저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 날을 위해 평생 공부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제가 새로 믿게 된 바와 어떻게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을까요? 어머니와 저는 이 일생일대의 예식이 저의 유대적 유산에 중요하다고 뜻을 모으고, 아버지와 예슈아 신앙에 대해 나누는 것은 바르 미쯔바 이후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 후에 아버지께 그렇게 전하고 나서 저는 자유롭게 학교와 회당의 유대인 친구들에게 모두 알렸습니다. 그리고 정말 듣고자 하는 모두에게 이야기를 했죠.

그해 후반에 학교에서 (자유 주제로) 웅변 대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신청을 하고 구약 성경만을 인용하여 예슈아께서 유대인의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제 웅변 이후 학교엔 큰 난리가 났습니다. 이후 몇 주간 선생님들, 직원들과 학생들과 격렬한 토론을 했지만, 저는 금기시 되어 왔던 주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도전 받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특별한 때였다고 기억합니다.

주님께 삶을 헌신한 순간, 저는 유대인 친구들에게 예슈아를 아는 지식을 전하라는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여기에는 이스라엘이 포함되리라는 것도 깊이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계는 여전히 저희에게 조금 변칙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저희는 같은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전혀 알지 못했죠. 그래서 어머니와 제가 교회에 출석하기로 하게 된 것은 겨우 제가 14살 때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저희는 메시아닉 유대교 공동체에 소개를 받았고, 저희의 많은 정체성 갈등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저희는 오르 하올람 메시아닉 공동체에 출석했고, 저희의 유대적 유산이 예슈아와 동행하는 신앙 생활에 충분히 한 부분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어 안심이었습니다. 그 공동체에서 저는 청소년 예배 인도를 하게 됐고, 그때부터 저는 그 일을 제가 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대학 시절의 에반

고등학교 이후 저는 캔자스의 대학교에 갔습니다. 주님과 여전히 동행하고 있긴 했지만, 너무나 새로운 기회들이 많아 예배에 대한 초점을 잃고, 곧 음악계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사랑 노래를 쓰게 됐고 학교 생활 중에 여러 밴드를 조직합니다. 결국 저는 기독교계통으로 알려진 한 음반사에서 인턴십을 하기에 이릅니다. 한동안 제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알았지만, 그곳 파트너가 하나님을 대놓고 조롱하는 가사를 쓰는 밴드와 계약을 하고자 했을 때 저는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들과 모든 관계를 끊고자 했고, 당연히 해고를 당했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일련의 사건들은 제가 원래 부르심을 받았던 사역으로 돌아오게 해줬습니다. 저는 집에 가서 오르 하올람의 청소년들을 다시 맡았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며 제 주변의 어린 친구들에게 많이 쏟아부었습니다.

다음 해 여름, 저는 메시아 컨퍼런스에 갔다가 랠리와 폴레트 워싱턴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야기가 통해서 그들이 저에게 덴버로 이사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의 탄생에 참여하라고 제안했습니다. 메시아닉 유대인들과 기독교계의 다리를 놓는 데에 초점을 둔 사역이었죠. 일이 진행되면서 저는 프라미스 키퍼스 사역에도 관여하게 됐습니다.

이스라엘이 제 미래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았기에 저는 향후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그 땅을 정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덴버에서 3년을 지내면서 저는 젊은 유대인들을 위해 기획된 “뿌리 알기” 식의 투어에 참여했습니다. 투어를 한 뒤 현지의 믿는 유대인들을 만나기 위해 좀 더 머물렀죠. 한 걸음 한 걸음에 주님의 인도하심은 놀랍게 나타났습니다.

결혼식을 올리는 에반과 엘리사

홀로 그 땅을 정탐하던 첫 날에 저는 이후 아내가 된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저희가 만난 것은 같이 아는 친구들이 같은 날에 자신들의 집에 머물도록 우연히 잡아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엘리사와 저는 다른 한 친구와 함께 그곳으로 가기 전에 요기를 하고자 했습니다. 갈만한 식당이 너무나 많았는데, 저희는 처음 같이 하는 식사를 이후 저희의 사역 센터가 자리하게 될 곳 바로 건너편 식당에서 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저는 당시 달라스에 살던 엘리사와 계속 연락을 했습니다. 2007년, 저희는 결혼을 했고 엘리사는 저와 함께 덴버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이후 2년 동안 저희의 사역(하티크바 프로젝트)에 대한 비전을 다져갔습니다. 그리고 2009년, 덴버에서 5년을 보낸 끝에 저희는 이제 바다를 건너기 위해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티크바 치과 클리닉

클리닉

하티크바 프로젝트는 저희가 이스라엘로 갔을 때 이미 미국에서 완성되어 있었기에, 그냥 운영만 하면 됐습니다. 언어학교와 여러 가지 창업 활동을 병행하면서 저희는 도움을 줄 어려운 가정들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금세 사람들이 상당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치과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각 치료마다 비용이 너무나 비싸서, 예산의 커다란 부분이 치과 필요를 채우는 데에 쓰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진료를 직접 제공하면 훨씬 더 낮은 비용에 제공을 할 수 있게 되느냐였습니다. 너무나 흥미롭게도 엘리사는 치위생을 4년 동안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치위생사들은 평균 2년 공부), 그 덕에 최고 수준의 클리닉을 차릴 자격이 되었습니다.

2015년, 저희는 최초의 치과 클리닉을 열었는데 여기서 보조를 크게 받으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면적인 치과 진료를 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부터 저희는 이 서비스를 메시아닉 신자들의 것으로 공개적으로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누구든지 저희 클리닉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신체적인 필요 뿐 아니랑 영적인 필요에 있어서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정부에서도 못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기에, 사회복지 부처에서는 환자들에게 저희 클리닉을 추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라도 예슈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위협감을 느끼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기에, 저희는 환자들이 갑자기 불안해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사회복지청에 저희 클리닉은 믿는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모든 것을 예슈아의 이름으로 하는 메시아닉 클리닉이라는 것을 “경고”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신규 환자들이 의료 서류들과 함께 저희에 대한 “주의 사항” 전단지를 함께 들고 저희 클리닉에 들어오는 것을 자주 봅니다.

입양

15살 때쯤, 저와 어머니(아기 때 입양되셨음)는 영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드디어 자신의 입양 서류를 살펴보기로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친부모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당시 어머니를 입양기관에 내놓고, 결혼을 한 뒤 네 자녀를 더 낳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을 만나보니,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며 입양시켜버린 딸이 항상 자신들에게 돌아오기를 기도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입양 서류들에는 아동이 찾는 과정을 시작해야만 한다는 조항이 있어서, 부모로서 어머니를 먼저 찾아나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입양 부모님을 사랑하며 자랐습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그분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셨으니까요. 그러나 새로운 가족들을 재회하고 나니, 입양 조부모님들이 저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로 인해서 충격을 받게 됐습니다. 어머니를 낙태하지 않기로 한 제 생조모의 선택은 어머니를 좋은 가정에서 키우겠다는 입양 조부모님들의 의지와 합쳐졌는데, 이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제 자녀들이 존재하고, 이 두 가지 선택으로 인해서 그 이후의 세대들도 등장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제 삶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고, 제가 낙태, 입양 그리고 위탁 가정에 대해 열정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된 이유가 됩니다. 2016년, 저희는 이스라엘에서 위험 상황에 있거나 부모가 없는 아이들의 정책과 현주소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는 젊은 어머니들을 지원해주는 믿는 단체들은 여럿이 있는 반면,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 가운데 위탁 가정이나 입양에 대한 운동은 없었습니다.

입양이나 위탁 과정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지만, 대단히 스트레스가 되고 복잡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세상 모든 것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나라인데 바로 종교적인 위임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위임은 랍비적으로 유대인(유대인 어머니를 통해 출생)인 자녀가 랍비적으로 유대인인 가정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아랍 아이는 아랍 가정과 연결되어야 하고요. 딜레마가 되는 것은 아랍인과 유대인 혼혈 가정의 경우, 혹은 아버지만 유대인인 가정의 경우는 이례적으로 간주되죠. 이것이 저희에게 유리한 것은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들이 정부에게 이례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배정 불가’로 분류된 아이들을 위한 가정을 제공할 입장이 완벽히 조성되는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사회복지청은 저희 뜻에 합의했고 저희는 지난 한 해 동안만 두 번의 중요한 돌파를 목격했습니다. 아주 공개적으로 메시아닉인 가정으로서 저희가 아이를 입양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메시아닉 가정도 공개적으로 위탁권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이제 따뜻한 집에서 지내게 될 아이들에게 너무나 좋을 뿐 아니라, 메시아닉들이 이스라엘 사회에 귀중한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데에 커다란 진전인 것입니다.

아티스트 모임 스튜디오에서 첫 싱글을 녹음하는 에반

노래

10년 동안 이스라엘에 살면서 저는 지역 공동체에서 때로 예배를 인도하며 히브리어로 작곡을 했습니다. 제가 쓴 곡 일부는 이스라엘의 공동체들에서 불리지만, 제 꿈은 제가 쓴 곡들로 앨범 하나를 채워 발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하는 일이 너무나 많고 음악 프로젝트라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만큼 광범위한 것이라서 그저 꿈일 뿐이었죠.

2년 전쯤, 저는 초대 받은 사람들만 모이는, 아티스트 모임의 스튜디오 만남에 다른 수십 명의 뮤지션 및 예배 인도자들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전국에서 뮤지션들이 모인 그곳에서 그들은 지역 공동체에 히브리어 창작 찬양들이 채워지고 결국 이스라엘이 전 세계적 예배 음악의 원천이 되리라는 비전을 나눴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믿는 이스라엘 뮤지션들이 와서 창작하고, 다른 창의적 아티스트들과 함께 교제할 장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죠.

굉장한 비전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직접 음악을 프로듀싱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말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아티스트 모임에 가입했습니다. 저희는 제가 쓴 곡들 중에 가장 좋은 작품을 선별했고, 얼마 전에 제 첫 싱글 보레 크도쉼(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을 발표했습니다. 저는 나머지 앨범이 올해 말에 나오게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해는 정말 힘들었지만, 저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아주 아끼시는 일임을 또렷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에 대한 열정을 주실 때, 그리고서 그 열정을 제쳐둬야 하는 자리에 두실 때가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주님의 꿈을 이루느라 열심히 살고 있는 사이에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꿈을 이뤄주시는 거죠. 그러니 주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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